[화담일보=고여경기자]
소형모듈원자로(SMR)와 인공지능(AI)을 비롯한 차세대 기술이 원자력 산업의 주요 의제로 떠오른 가운데, 한국에서 열린 국제원자력기구(IAEA) 원자력 장관회의가 29일 막을 내렸다. 이번 회의는 원전의 안전한 이용과 신기술 상용화를 위한 국제 협력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기술 경쟁력을 외교·통상 성과로 연결하기 위해 한국이 풀어야 할 과제를 드러냈다.
이번 회의는 10월 27일부터 29일까지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62개국 정부 대표와 5개 국제기구, 국내외 약 85개 기업 관계자 등 800여 명이 참석해 원전 도입과 건설에 필요한 제도, 재원 조달, 전문인력 양성, 국제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AI와 디지털 트윈 등 신기술의 원자력 분야 활용도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한국은 회의에서 안전과 투명성에 기반한 신뢰 강화, SMR의 안전한 개발·실증, 글로벌 원자력 생산 거점 도약을 핵심 방향으로 제시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한국의 원자력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IAEA 회원국과 인재 양성, 기술 교류, 산업 협력을 추진하겠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기술 경쟁력만으로는 부족한 SMR·AI 외교
SMR은 기존 대형 원전보다 작은 규모로 설계되는 원자로로, 전력 수요와 입지 여건에 따라 다양한 활용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 확대와 산업용 열 공급, 해양 분야 활용 등은 차세대 원자력 기술의 적용 가능성을 넓히는 요인으로 꼽힌다. 다만 실제 상용화에는 기술 실증뿐 아니라 안전성 검증, 인허가 체계, 사업비와 건설 일정의 예측 가능성, 안정적인 수요 확보가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AI와 디지털 트윈을 원전 운영에 적용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기존 안전조건을 유지하면서 AI 모니터링과 디지털 트윈을 도입할 수 있는 체계를 논의했다. 신기술은 설비 상태 감시와 운영 효율 개선에 활용될 가능성이 있지만, 원자력 시설에 적용하려면 시스템의 신뢰성, 사이버 보안, 인간의 감독과 책임, 규제기관의 검증 기준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기술 도입 자체보다 안전성과 투명성을 입증하는 제도가 국제적 신뢰를 좌우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국제협력은 기술을 실제 사업으로 연결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회의에서는 정부와 기업, 투자자가 사업 위험을 분담하는 방안과 IAEA의 원전 도입 준비 점검을 세계은행그룹 등 금융기관의 지원과 연계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원전 건설은 초기 투자 규모가 크고 사업 기간이 길어 금융 조달과 규제 역량, 전문인력 확보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기술을 보유한 국가라도 이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해외 사업을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어렵다.
한미 원자력 협력, 시장 기회와 협상 과제
한국의 원자력 외교에서 미국과의 협력은 중요한 축이다. 한국은 원전 설계·건설과 기자재 공급 역량을 바탕으로 해외 사업을 추진해 왔으며, 미국과의 협력은 자국 기업의 시장 참여와 공급망 확대 측면에서 기회가 될 수 있다. 양국은 2026년 9월 전략적 투자 사업 추진 계획을 발표했고, 원자력 분야에서는 미국 내 대형 원전 8기 건설을 위한 협력 틀을 제시했다. 다만 구체적인 사업 이행에는 후속 협의와 계약, 인허가 등 절차가 남아 있다.
상업적 원전 협력과 별개로 핵연료와 안보 관련 협의도 진행 중이다. 한국은 핵추진잠수함 추진 구상과 민간 목적의 우라늄 농축·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역량 확보를 미국과 논의해 왔다. 양국은 2026년 6월 서울에서 관련 후속 협의를 시작했으며, 10월 초 한국 정부는 핵추진잠수함과 농축·재처리 등 주요 현안에서 실질적 진전을 내기 위해 미국과 협의를 가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협력 가능성이 곧 구체적인 합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10월 29일 보도된 미국 정부 관계자의 발언에서도 농축·재처리 협력의 가능성이 언급되는 한편, 한미 원자력협정에 관한 추가 협상이 필요하고 해결해야 할 쟁점이 남아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핵추진잠수함의 연료 확보와 기술 협력 역시 실제 이행 조건을 구체화해야 하는 사안이다.
특히 원전 사업과 통상·투자 협의, 안보 현안이 동시에 논의되는 환경에서는 각 사안의 조건과 이행 절차를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미국 시장 진출은 한국 기업에 사업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만, 투자 규모와 위험 분담, 현지 규제 준수, 기술·지식재산권 문제 등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양국 간 협력의 범위가 확대될수록 합의의 문구뿐 아니라 실제 계약과 제도적 권한이 어디까지 확보되는지가 중요해진다.
에너지 안보와 전략적 자율성의 균형
한국이 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원전 수출 확대와 에너지 안보를 함께 달성하는 것이다. 원전은 저탄소 전력 공급과 에너지 공급원 다변화에 기여할 수 있지만, 원전 연료 공급망과 사용후핵연료 관리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정책 과제로 남아 있다. 핵연료의 해외 의존도를 관리하고 사용후핵연료 처리 방안을 마련하는 일은 산업 경쟁력뿐 아니라 외교적 협상 여건에도 영향을 미친다.
미국의 정책 변화와 통상 환경도 고려해야 한다. 미국의 중간선거 등 정치 일정은 정책 논의의 환경에 변수가 될 수 있지만, 선거 결과가 한미 원자력 협력에 미칠 구체적인 영향은 단정하기 어렵다. 한국은 정치적 전망에만 의존하기보다 기존 합의의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사업별 위험과 비용을 평가하며, 협력 조건을 문서와 제도로 구체화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이번 IAEA 원자력 장관회의는 원자력의 미래가 기술 개발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줬다. SMR과 AI의 상용화에는 안전성 검증과 규제 협력, 금융 조달, 전문인력, 사회적 신뢰가 함께 필요하다. 한국이 원전 기술력을 지속 가능한 외교·산업 성과로 연결하려면 국제 규범과 안전 기준을 준수하면서 협상력을 높이고, 시장 확대와 핵연료·폐기물 관리 등 구조적 과제를 함께 다뤄야 한다. 회의에서 확인된 국제 협력 의제를 실제 사업과 제도적 성과로 전환하는 것이 앞으로의 핵심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