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면 파전과 함께 떠오르고, 농사일을 마친 들판에서는 허기를 달래던 술. 막걸리는 오랫동안 한국인의 일상과 함께했다. 10월 29일 ‘막걸리의 날’을 맞아 한때 농부의 새참이자 시인의 벗이었던 막걸리의 이야기를 되짚어본다. 술 한 잔에 담긴 역사뿐 아니라 오늘날 사람들이 막걸리를 찾는 이유, 우리 술이 다음 세대에도 살아남기 위한 조건을 살펴본다.

막걸리는 왜 ‘막걸리’일까
막걸리라는 이름에는 술을 만드는 방법이 담겨 있다. 발효한 술을 거칠게 걸러낸다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맑게 걸러낸 술과 달리 곡물의 성분이 남아 뿌연 빛깔을 띤다.
막걸리는 쌀과 누룩, 물을 바탕으로 빚는 발효주다. 누룩 속 미생물이 곡물의 전분을 당으로 바꾸고, 효모가 당을 알코올로 발효시킨다. 원료와 발효 조건, 거르는 방식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같은 막걸리라도 어느 지역에서 어떤 재료로 빚었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술이 된다. 단맛과 신맛의 균형, 입안에 남는 질감, 발효에서 비롯된 향까지 다양하다.
흔히 막걸리를 하나의 술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지역과 양조장의 이야기가 담긴 술이다.

농부에게는 새참, 시인에게는 벗
막걸리의 옛 이름 가운데 하나는 ‘농주(農酒)’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즐겨 마시던 술이라는 뜻이다.
모내기와 김매기처럼 힘든 농사일을 하던 시절, 막걸리는 들판의 새참과 함께 등장했다. 오늘날처럼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않았던 때에는 곡물 성분이 남아 있는 막걸리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막걸리가 특별했던 까닭은 값이나 맛에만 있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술을 나누는 풍경에도 있었다.
농부에게 막걸리가 고된 노동 뒤의 술이었다면, 문인에게는 일상의 벗이기도 했다.
시인 천상병은 막걸리를 즐겼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20년 특별전 《막걸리, 거친 일상의 벗》에서 천상병의 막걸리 사랑을 비롯해 문학과 정치, 노래와 영화에 등장한 막걸리 문화를 소개했다.
막걸리를 마시는 장소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논밭과 장터, 주막에서 대폿집과 학사주점으로 이어졌다. 술을 마시는 사람과 공간은 바뀌었지만, 막걸리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술이었다는 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누룩을 발로 밟는 이유…술맛에는 지역의 손길이 있다
막걸리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는 양조장에도 남아 있다.
부산 금정산성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누룩을 발로 밟아 만드는 ‘족타식’ 제조법이 이어져 왔다. 누룩 반죽을 밟아 모양을 잡고 미생물이 자라도록 관리하는 과정이다.
누룩은 단순한 발효 재료가 아니다. 술의 맛과 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같은 곡물을 사용하더라도 누룩의 종류와 발효 방식에 따라 다른 맛이 나온다.
금정산성의 누룩 이야기는 막걸리의 지역성을 보여준다. 술맛은 단순히 제조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룩을 만들고 발효 상태를 살피는 사람의 경험도 함께 작용한다.
이처럼 지역 양조장의 기술과 기억은 막걸리를 공장에서 생산하는 상품 이상의 문화로 이해하게 한다.

막걸리의 날은 왜 하필 10월 마지막 목요일일까
막걸리의 날이 가을에 있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가을은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거두는 계절이다. 정부와 막걸리 업계는 2011년부터 쌀 수확과 도정, 양조에 필요한 시간을 고려해 10월 마지막 목요일을 막걸리의 날로 정했다.
그해 수확한 햅쌀로 빚은 막걸리를 선보이는 ‘막걸리 누보’도 이 기념일과 함께 추진했다. 프랑스에서 그해 수확한 포도로 만든 보졸레 누보를 기다리듯, 우리도 햅쌀로 빚은 술을 함께 즐기자는 취지였다.
이러한 시도는 막걸리를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농사의 계절과 연결된 문화로 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념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전통주 문화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날을 기다리고, 술이 만들어진 지역과 재료에 관심을 가질 때 기념일은 생활 속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왜 막걸리를 마실까
과거 막걸리가 농촌의 노동과 일상에 가까운 술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선택의 이유가 달라졌다.
막걸리를 찾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특유의 맛이다. 발효에서 나오는 산미와 곡물의 풍미, 부드러운 질감은 다른 주류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달고 가벼운 막걸리부터 산미가 뚜렷하고 묵직한 막걸리까지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
음식과의 조화도 빼놓을 수 없다. 파전과 막걸리의 조합은 익숙하지만, 막걸리를 전과 함께 마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곡물의 풍미와 산미를 살펴 다양한 한식에 곁들이거나 새로운 음식과 조합할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지역성과 이야기다.
어느 지역에서 재배한 쌀을 사용했는지, 어떤 누룩으로 발효했는지, 양조장이 어떤 방식으로 술을 빚는지 알게 되면 막걸리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한 잔의 막걸리를 통해 지역의 농업과 식문화, 술을 빚는 사람의 기술을 함께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전통주라는 이유만으로 소비자가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맛과 품질이 좋아야 하고, 가격과 구매 편의성도 갖춰야 한다. 전통이라는 이름은 술을 이해할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다시 마시게 만드는 것은 결국 술 자체의 매력이다.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옛날 술을 그대로 만드는 일일까
막걸리를 살리려면 무엇을 지켜야 할까.

오래된 제조법을 기록하고 전승하는 일은 중요하다. 지역마다 남아 있는 누룩 제조 기술과 발효 방식, 양조장의 역사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전통을 지킨다는 이유로 모든 술을 과거의 형태에 묶어둘 필요는 없다.
전통 제조법을 충실히 이어가는 술이 있는가 하면, 기존 발효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맛을 개발하는 술도 있을 수 있다. 두 방식은 서로 대립하기보다 우리 술의 선택지를 넓힐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먼저 지역 양조장의 기술과 기록을 체계적으로 조사해야 한다. 누룩을 만드는 방법과 발효 과정뿐 아니라 양조장에 얽힌 지역 주민의 기억도 기록할 필요가 있다.
국산 쌀과 지역 농업의 연결도 강화해야 한다. 막걸리 소비가 늘어도 원료가 지역 농산물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 효과가 농촌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소비자가 술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원료와 제조 방식, 맛의 특징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일도 필요하다. 생산자의 이름과 지역의 이야기를 알려주는 방식은 막걸리를 고르는 기준을 넓힐 수 있다.
무엇보다 다음 세대가 막걸리를 낡은 술로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젊은 양조인의 진입을 돕고, 전통 양조 기술을 배우고 연구할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소비자에게는 다양한 막걸리를 비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전통주의 발전을 단순히 판매량이나 수출액으로만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다. 지역의 술 빚는 기술이 얼마나 이어지고 있는지, 양조장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지, 소비자가 얼마나 다양한 우리 술을 접할 수 있는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한 잔의 막걸리가 다음 세대에도 남으려면
막걸리는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었다. 농사일을 마친 사람들의 새참 곁에 있었고, 장터와 주막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문인들의 일상에도 등장했고, 지역마다 서로 다른 맛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막걸리는 더 이상 농촌의 일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식당과 주점, 지역 양조장과 새로운 술 문화 속에서 소비자를 만난다.
그렇다면 막걸리의 미래는 과거의 명성을 되찾는 데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오래된 제조 기술을 지키면서도 오늘날의 소비자가 선택할 만한 맛과 품질을 만들어야 한다. 지역의 농업과 양조장을 연결하고, 술을 빚는 사람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
10월 29일 막걸리의 날이 던지는 질문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막걸리를 오래된 술이기 때문에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도 마시고 싶은 술로 만들어 갈 것인가.
전통이 살아 있다는 것은 박물관에 기록이 남아 있다는 뜻만은 아니다. 지금도 누군가 그 기술을 배우고, 술을 빚고, 그 맛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막걸리의 내일 역시 술을 빚는 사람과 그 술을 즐기는 사람의 일상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