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벌부는 사라졌으나, 영수증의 논리는 남았다
1517년, 비텐베르크의 고해실이다. 한 사제가 교구민의 고백을 기다린다. 그런데 신자들은 죄 대신 종이 한 장을 내민다. 작센 땅 경계 너머 위터보크까지 걸어가 사 온 면벌부다. 이것이 있으니 이제 회개는 필요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사제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였다.
그때 이후로 509년이 흘렀다. 며칠 뒤면 다시 10월 31일이다. 종이 증서는 박물관으로 들어갔으나, 그 종이를 떠받치던 셈법은 아직 우리 곁에 앉아 있다. 헌금의 액수와 축복의 크기를 맞바꾸려는 마음, 출석과 직분을 하나님께 내미는 영수증으로 여기는 습관이 그것이다. 종교개혁을 과거형으로 말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루터가 처음부터 반역자였던 건 아니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이자 시 교회의 설교자였고, 이미 1514년부터 면벌부 남용이 은혜를 값싸게 만든다고 설교했다. 그를 결정적으로 흔든 건 교리서가 아니었다. 증서를 쥐고 돌아와 더는 뉘우칠 것이 없다고 말하던 교인들의 얼굴이었다.
사건의 뿌리는 돈이었다
1517년 당시 스물일곱 살이던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는 마그데부르크와 할버슈타트에 이어 마인츠 대주교 자리까지 겸하려 했다. 겸직 허가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은행 가문 푸거에게서 돈을 빌렸는데, 교회사가 필립 샤프는 그 액수를 금화 3만 플로린으로 기록한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 자금이 필요했다. 둘은 면벌부 판매 수익을 절반씩 나누기로 했다. 한쪽 절반은 대성당으로, 다른 절반은 은행 빚을 갚는 데 쓰였다.
판매의 얼굴은 도미니코회 수사 요한 테첼이었다. 당시 교회의 가르침에서 면벌부는 죄 자체를 용서하는 증서가 아니라 죄에 따르는 일시적인 벌을 덜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테첼은 진심 어린 뉘우침 없이도 증서만으로 사면을 얻는다고 설교했다. 당대 신학자 가운데서도 소수였던 이 견해를 루터는 정면으로 문제 삼았다. 동전이 궤짝에 떨어져 울리는 순간 연옥의 영혼이 튀어 오른다는 운율이 그의 설교를 따라 퍼졌다. 설교자 뒤에는 푸거 은행의 직원들이 서서 은행 몫을 거두었다. 작센의 통치자 프리드리히는 자기 땅에서 테첼의 설교를 막았고, 비텐베르크 사람들은 경계를 넘어가 증서를 사 왔다. 은혜가 국경을 넘어 거래되고, 그 장부를 은행원이 지켜본 것이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편지와 논제를 보냈다. 이 편지는 원본이 남아 있다. 그러나 성당 문에 망치로 논제를 박았다는 장면은 사정이 다르다. 1961년 가톨릭 교회사가 에르빈 이저로는 그 장면을 처음 언급한 이가 루터 사후의 멜란히톤이며, 루터 자신은 한 번도 그 일을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반론도 꾸준히 나와 논쟁은 지금도 닫히지 않았다. 나는 이 미결 상태가 싫지 않다. 문에 박혔든 우편으로 갔든, 그 종이에 적힌 문장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개혁의 무게는 망치 소리가 아니라 첫 문장에 있었다
"우리의 주이자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신자의 온 삶이 회개이기를 원하셨다." 면벌부는 회개를 단번에 사서 끝내는 거래로 만들었다. 루터는 그 거래를 평생의 방향 전환으로 되돌려 놓았다. 현대인의 성경은 예수의 첫 선포를 이렇게 옮긴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다."(마 4:17)
라틴어로 쓴 이 토론 제안서는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서른일곱 번째 논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면벌부 없이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유익을 받는다고 밝혔다. 서른아홉 번째와 마흔 번째 논제는 참된 회개는 벌을 피하지 않는데 면벌부는 벌을 피하는 법부터 가르친다고 꼬집었다. 알브레히트는 논제를 로마로 넘겼고, 테첼은 이듬해 1월 106개의 반박 논제로 맞섰다. 덧붙여 둘 것이 있다. 개신교 측 기록이 테첼의 입에 올린 일부 극단적 발언을 테첼 자신은 부인했다. 개혁의 역사를 쓸 때조차 상대를 과장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실 앞에 서는 첫걸음이다.
1520년 12월, 루터는 주장을 거두라는 교황의 공식 문서를 비텐베르크 성문 밖 불길에 던졌다. 되돌아갈 다리를 스스로 끊은 것이다. 1521년 4월, 그는 보름스에서 황제 카를 5세 앞에 섰다. 저서를 철회하라는 요구에 그는 성경과 분명한 이성으로 설득되지 않는 한 물러설 수 없다고 답했다. 지금 철회하면 폭정을 굳히는 일이 될 뿐이라는 말도 남겼다. 흔히 따라붙는 "내가 여기 서 있다"라는 말은 현장 기록이 아니라 가장 이른 인쇄본에 덧붙은 문장이다. 훗날 루터는 그 자리에서 더 담대하지 못했다며 가책을 털어놓았다. 역사가 영웅의 순간으로 기억하는 장면을, 정작 당사자는 부족했던 순간으로 기억한 것이다.
교회의 신화를 의심하며 출발한 운동이라면, 자기 영웅의 신화도 의심할 줄 알아야 한다. 보름스를 떠난 루터는 프리드리히의 계획에 따라 '납치'되어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었다. 1521년 5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였다. 그는 '융커 외르크'라는 가명으로 수염을 기르며 지냈고, 편지에서 그곳을 자신의 밧모섬이라 불렀다. 그 고립 속에서 그는 에라스뮈스가 펴낸 그리스어 본문을 곁에 두고 단 11주 만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옮겼다.
이 번역은 멜란히톤과 다듬고 크라나흐의 목판화를 얹어 1522년 9월에 나왔다. 이른바 '9월 성경'은 한 권 값이 학교 교사 두 달 치 급여였지만, 초판이 몇 주 만에 동나 그해 12월에 개정판이 나왔다. 사실 루터 이전에도 독일어 성경은 있었다.
그의 공로는 '최초'가 아니라, 학자의 독일어가 아닌 장터의 독일어로 원문을 다시 옮겼다는 데 있었다. 루터는 독일어를 어떻게 말할지 라틴어 문자에게 묻지 말고, 집 안의 어머니와 골목의 아이들과 시장의 서민에게 물어야 한다고 했다. 말씀이 성직자의 서가에서 부엌으로 내려온 것이다.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미 제사장
앞서 1520년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에서 그는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미 제사장으로 세워졌다고 선언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이 근거였다. 직무는 공동체가 맡기는 것이며, 맡은 동안만 앞에 선다는 것이다. 성직은 신분이 아니라 섬김의 자리가 되었다. 같은 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 생각을 한 쌍의 역설로 묶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사랑으로 모든 이웃을 섬기는 종이라는 것이다.
그 신학은 곧 장부가 되었다. 1523년 작은 도시 라이스니히의 교회는 교회 재산과 헌금을 한 궤에 모아 가난한 이웃과 학교와 목회에 쓰기로 했고, 루터는 그 조례에 서문을 붙여 펴냈다. 궤는 회중이 뽑은 귀족 둘, 시의원 둘, 시민 셋, 농민 셋이 관리했고, 각자 능력과 형편에 따라 금고를 채운다는 조항도 들어 있었다. 면벌부의 궤가 영혼의 값을 매기던 자리에, 이웃의 빵을 담는 궤가 놓인 것이다.
회개, 말씀, 이웃. 루터가 되찾은 것은 이 세 가지였다. 그에게 개혁은 새 교회를 세우는 기획이 아니라, 있던 교회를 복음 앞에 다시 세우려는 몸부림이었다.

개혁자도 개혁의 대상이다
2026년 2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9.0%,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5.4%였다. 2008년 첫 조사의 18.4%에서 2023년 21%까지 더디게 오르던 신뢰도가 다시 꺾인 것이다. 가장 신뢰하는 종교로 개신교를 꼽은 비율은 13.6%로, 가톨릭과 불교에 크게 뒤졌다. 교회의 정치 참여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88.5%였고, 개신교인 응답자 안에서도 83%가 반대했다. 공동의 이익과 종교적 신념이 부딪칠 때 교회가 신념 쪽을 택하리라고 본 응답도 62.3%였다. 다만 한국교회가 사회에 기여한다는 응답은 24.1%에서 30.9%로 올랐다.
숫자는 차갑지만 정확하다. 사회는 한국교회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교인 수와 건물을 성공의 잣대로 삼는 성장주의, 교회를 한 가문의 상속 물처럼 넘기는 세습 논쟁, 헌신을 축복의 담보로 바꾸는 설교. 나는 이것을 이 시대의 면벌부라고 부른다. 증서는 사라졌으나, 은혜를 거래로 바꾸는 상상력은 그대로다. 그래도 기여도가 오른 대목은 희망의 틈이다. 섬김의 손길은 숫자보다 먼저 이웃에게 닿는다. 오늘의 교회가 재정을 몇몇 서랍에서 꺼내 라이스니히처럼 회중의 탁자 위에 올려놓을 때, 신뢰의 회복은 설교보다 장부에서 먼저 시작될지 모른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이 구호는 루터의 것이 아니다. 학자들은 그 뿌리를 1674년 네덜란드 목사 요도쿠스 판 로덴슈타인의 경건 서적에서 찾는다. 다만 정확한 문구의 단일한 기원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원래의 뜻이다. 그는 교리와 예배와 교회 정치는 이미 성경대로 개혁되었다고 보았다. 그가 끝없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본 것은 사람의 마음, 곧 바른 교리를 외우면서도 살아 있는 믿음은 잃어버리는 형식주의였다. 입술로는 공경하지만 마음은 먼 백성을 꾸짖은 예수의 말씀(마 15:8)이 그 경고의 중심에 있었다.
이 구호를 정면으로 살아 낸 장면이 있다. 루터는 1543년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를 써서 회당을 불태우라고까지 촉구했고, 이 글은 수백 년 뒤 나치의 선전에 이용되었다. 1994년, 미국 최대 루터 교단인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는 공식 선언으로 루터의 반유대적 저술을 거부했다. 개혁자의 이름을 교단 이름에 새긴 교회가 개혁자의 죄를 회개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종교개혁의 가장 루터다운 순간이라고 믿는다. 첫 논제의 회개는 상대를 향한 칼이 아니라, 먼저 나를 향한 거울이었다.
1546년 2월 16일, 루터는 숨을 거두기 이틀 전 종잇조각에 마지막 메모를 남겼다. "우리는 거지다. 이것은 참이다." 제1 논제의 회개에서 마지막 메모의 거지 고백까지, 29년이 하나의 문장처럼 이어진다. 개혁은 망치가 아니라 무릎이었다. 509년이 지난 오늘, 나는 내 서랍 속에 숨겨 둔 면벌부를 꺼내 본다. 섬김의 연수, 쌓아 온 경력, 남보다 낫다는 은밀한 안도. 그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 오래된 문장이 내 안에서 다시 시작된다. 신자의 온 삶이 회개이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