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는 생각의 거울이자 사회의 가치를 반영하는 척도가 된다. 특히 정책을 수립하고 대중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가와 행정 지도자의 언어는 그 자체로 사회적 신뢰와 신념의 기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국정감사장에서 나온 경기도지사의 “소방이 가장 큰 골치 아픈 재정 빨대 같다”라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불길 속에서 생명을 구하며 ‘헬멧을 쓴 하나님’이라 불리던 소방관의 존재가, 단순히 예산을 소모하는 ‘재정 빨대’로 격하된 순간이다.
도지사로서 도정 운영의 어려움을 토로하거나 국비 지원 체계의 모순을 설명하려는 취지였다고 했다. 하지만,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거는 숭고한 일도, 도지사에게는 ‘재정 빨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도지사의 인식은 국민의 마음을 할퀴고 큰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는 어디선가 덧날 것이고, 그 상처는 도지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것이다. 자라나는 미래 세대를 교육하는 교사, 미래의 꿈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학생, 그리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부모를 도지사가 말로 할퀸 것이다.
첫째, 이웃을 위해 헌신하려는 청소년들의 순수한 꿈을 짓밟았다.
학교 교육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다. 많은 청소년이 이 사회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진로를 선택한다. 국가를 지키는 직업군인,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 그리고 화염과 위험 속에서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이 그것이다. 청소년들은 이들을 보면서, "나도 국가를 위하고 남을 돕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라는 꿈을 품는다.
그러나 한 도지사의 입에서 나온 '재정 빨대'라는 차가운 언어는 아이들의 순수한 신념을 한순간에 흔들어 놓았다. “너희가 꿈꾸는 희생과 헌신은, 정치와 행정의 눈에는 그저 ‘예산을 축내는 부채’에 불과하다”라는 비정한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이는 타인을 위해 봉사하라고 가르쳐 온 학교 교육의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청소년들에게 지극히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삶을 선택하라고 무언으로 압박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사회는, 국가 지도자는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왜곡된 통념을 학습하게 되며, 결국 공공재와 공동체를 위한 희생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 결국 지극히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계산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교육과 철학, 처신을 선택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둘째, '사람이 먼저'라던 진보 교육과 진보적 가치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발언의 주체는 여당 대표와 법무부 장관을 거치며 진보 진영의 중진이자 리더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필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의 존경과 기대를 받아온 정치가다. 지금까지 진보 진영과 진보 교육계는 ‘인간의 존엄성’, ‘노동의 가치’, ‘공동체적 연대’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며 보수 진영의 효율성 중심 논리를 비판해 왔다. 개인의 존엄성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말해왔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을 최전선에서 지키는 이들을 ‘예산을 잡아먹는 재정 빨대’로 취급한 모습은 지금까지 그들이 말해온 가치가 얼마나 가식적이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진보를 표방해 온 이들이 가진 국민의 생명과 삶에 대한 속마음이 무엇이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는 현장에서 ‘사람 중심의 가치’를 실천하려 애써 온 교육자들과 대중에게 이번 발언은 깊은 회의감을 안겨 주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길에 뛰어드는 소방관조차 손익 계산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오만함은, 그동안 주창해 온 진보적 가치와 ‘사람이 먼저’라는 슬로건의 진정성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셋째,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내 아이가 사회에서 '단순한 도구'로 전락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주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이번 논란은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내 자식에게 닥쳐올지 모를 암울한 미래의 예고라 할 수 있다. 나의 소중한 자녀가 아무리 사회에 기여하고 정직하게 살아간다 해도, 지도자의 눈에는 그저 ‘재정적 부담’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서늘한 현실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세금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고, 누군가의 헌신이 내 아이를 지켜준다는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 부모들의 불안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오늘 소방관의 숭고한 헌신에 대해 보여준 도지사의 차가운 시선은 국민의 삶의 안전망을 허물어 내리는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내 자녀가 일할 노동 현장으로 나갈 때, 부모가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때, 이미 그 안전망은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앞서기 때문이다.
나아가며 : 말은 그 사람의 가치와 철학을 대변한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곧 그 사람이 인식하고 사고할 수 있는 세계의 경계라고 보았다. 도지사가 말한 “재정 빨대”는 지자체장이 바라보는 공공재와 헌신의 가치가 어디에 닿아있는지를 그대로 증명한다.
미래 세대에게 훌륭한 시민이 되라고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에 대한 비하를 멈추어야 한다. 지도자의 언어는 국민을 조롱하거나 계산하는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존엄을 세우는 약속이어야 한다. 이번 논란이 우리 사회와 정치권 전체에 남긴 뼈아픈 경종을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