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창 시절 하굣길, 내 이어폰에서는 아무로 나미에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일본 드라마 《꽃보다 남자》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찾아보며 화면 속 낯선 거리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표정을 익혔다.
비슷한 시기, 야후재팬을 통해 알게 된 일본인 친구 사쿠라는 보아와 동방신기의 노래를 좋아했다. 《겨울연가》에 푹 빠진 그녀의 어머니는 환갑이 되기 전에 남이섬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사쿠라와 나는 서로의 나라에 관해 진지한 토론을 벌인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보다 먼저 노래를 주고받았고, 좋아하는 가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국가 사이에는 외교와 회담이 있지만, 사람 사이에는 취향과 공감이 있다. 정치가 국경선을 선명하게 긋는 동안에도 문화는 그 선을 가볍게 넘어 서로의 일상 안으로 스며든다.
한일관계는 과거를 묻어둘 수 없는 관계다. 식민 지배와 강제동원의 역사는 오늘의 외교적 편의를 위해 지우거나 흐려서는 안 된다. 대중문화가 그 역사를 대신 해결해 줄 수도 없다.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이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양국의 입장 차이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는 것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일본인을 하나의 얼굴로 뭉뚱그리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인도 한국에 대한 인식을 몇 개의 자극적인 뉴스와 편견만으로 판단하는 태도 역시 지양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진실로 경계해야 할 것은 기억 자체가 아니라, 기억을 상대를 단순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태도다.
음악은 바로 그 단순화를 무너뜨리는 아주 훌륭한 역할을 해낸다. 나는 일본 음악을 들으면서 그곳에도 사랑에 실패하고, 돈독한 우정을 나누며, 가족과 다투고,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배웠다. 사쿠라 역시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한국을 추상적인 이웃 국가가 아닌,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2015년과 2017년, 그리고 2024년에 찾은 도쿄 신오쿠보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거리에는 한국어 간판이 늘어서 있었고 한국 음식점과 화장품 가게에는 일본인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거창한 외교적 신념 때문에 그곳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기 위해서, 한국식 화장을 따라해보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국가 간의 이해는 어쩌면 그런 사소한 호기심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이해는 상대의 역사와 제도를 모두 공부한 뒤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노래 한 곡일 수도 있고, 가수의 근사한 외모, 혹은 드라마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작은 호기심이 반복될 때 낯선 대상은 익숙한 존재가 되고, 익숙한 존재는 어느덧 긍정적인 화학 작용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몇 해 전, 한일 가수들이 함께 출연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일본 가수 우타고코로 리에가 부른 노래가 한국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청자들은 처음에는 낯선 일본 가수를 바라보았지만, 노래가 시작된 뒤에는 한 사람의 목소리와 그 안에 담긴 공감을 들었다. 국적은 잠시 뒤로 물러난 자리에 어느새 들어온 것은 ‘감정’이었다.
이것이 음악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음악은 상대의 주장을 법이나 논리로 꺾지 않는다. 대신 상대를 한 명의 인간으로 마주하게 한다. 국제법이 사람을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집단으로 부를 때, 음악은 그 집단 안에 비슷한 얼굴과 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오롯이 보여준다.
사쿠라와 내가 서로의 노래를 주고받던 시절, 우리는 외교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작은 교환 속에는 어떤 공식 회담보다 소박하고 끈질긴 관계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고 믿는다.
일본의 유명 가수인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 ⟨흐르는 강물처럼⟩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산다는 건 여행을 떠나는 것 끝없이 이어지는 이 길 위해서”
강물은 자신이 지나온 자리를 지우지 않는다. 그저 수많은 굽이와 흔적을 품은 채 앞으로 흐를 뿐이다. 음악도 그렇다. 모든 게 멈춰 선 순간에도 음악은 강물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그렇게 국경을 초월한다.
세계화 시대에 모든 이들이 이렇듯 한 자리에 고여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기억을 품은 채, 때로는 부딪치고 때로는 나란히 흐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