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의 한 농업자재센터와 농협 앞에 검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붉고 노란 글씨가 선명하다. “농민 생존권 거래하지 마라! CPTPP 가입 결사반대!”농민들의 절박한 목소리다. 그러나 CPTPP라는 다섯 글자의 배경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농산물 시장개방 문제를 넘어 세계 경제질서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경쟁, 일본의 통상전략, 그리고 한국 경제의 구조적 딜레마와 마주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협정의 역사다. 미국이 주도했지만 미국은 떠났고, 일본이 이를 되살렸으며, 미국이 견제하려 했던 중국은 오히려 가입을 신청했다. 영국은 태평양에 접하지 않으면서도 이 협정에 참여했다. 도대체 각국은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그리고 수출로 성장해 온 한국은 왜 이 협정 앞에서 농민들의 거센 반대에 직면하고 있을까?
CPTPP(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Agreement for Trans-Pacific Partnership)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이다. 상품 관세 뿐 아니라 서비스, 투자, 전자상거래, 지식재산권, 노동, 환경 등 광범위한 경제규칙을 다루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이다. 그 출발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싱가포르, 뉴질랜드, 칠레, 브루나이 등 네 나라가 환태평양 전략적 경제동반자협정(P4)을 체결했다. 당시만 해도 세계 경제질서를 바꾸려는 거대한 구상보다는 개방경제 국가들이 무역과 투자의 장벽을 낮추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전환점은 미국의 참여였다. 2008년 미국이 협상 참여를 선언하고 이후 오바마 행정부가 이를 적극 추진하면서 협정의 성격이 달라졌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무역규칙을 주도하는 동시에 급속히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에 대응하려 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성장했고, 거대한 제조업 생산능력과 수출을 바탕으로 세계 공급망의 중심에 섰다. 앞으로 아시아·태평양의 경제규칙을 누가 만들 것인가?
중국 경제의 부상은 미국에 이런 질문을 던졌고, 시장개방을 확대하면서 노동·환경·국영기업·지식재산권 등에 관한 높은 수준의 규칙을 확립하려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이 질문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대응이었다. 물론 TPP의 원형인 P4가 처음부터 중국 견제를 목적으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는 지정학적 의미가 강해진 것은 분명하다.
2016년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12개국이 TPP에 서명했다. 하지만 협정은 발효되지 못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TPP 탈퇴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다자간 무역협정보다 미국의 협상력을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양자협정을 선호했고, 미국 내에서는 자유무역이 제조업 일자리 감소와 임금 압박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강했다.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 자신이 주도했던 협정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미국이 떠난 자리에 일본이 들어섰다. 미국의 탈퇴로 TPP는 사실상 좌초할 위기에 처했지만 일본은 협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은 호주 등 나머지 국가들과 협상을 이어갔고, 일부 조항의 적용을 정지한 뒤 2018년 3월 새로운 협정에 서명했다. 그해 12월 CPTPP가 발효됐다.
일본이 협정을 살린 이유는 단순히 수출 확대에 있지 않았다.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경제질서에서 규칙을 만드는 국가가 되고자 했다. 자동차와 기계 등 제조업의 해외시장 접근성을 높이는 동시에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지역에서 통상규범 형성의 주도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이 탈퇴했더라도 높은 수준의 무역규칙을 유지하면 장기적으로 미국의 복귀 가능성을 열어 둘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결국 일본은 미국이 남긴 통상질서의 틀을 유지하면서 자국의 경제적·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CPTPP가 단순한 관세 인하 협정이 아니라 경제활동의 규칙을 정하는 협정이라는 점이다. 상품의 국경 이동 뿐만 아니라 데이터의 이동, 기업의 투자활동, 국영기업의 경쟁조건, 환경과 노동에 관한 규범까지 다룬다. 이 때문에 CPTPP 참여는 특정 시장에 상품을 더 많이 판매하는 문제를 넘어 국제 경제질서의 형성 과정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2026년 10월 현재 CPTPP 회원국은 일본, 싱가포르,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멕시코, 칠레, 페루, 영국 등 12개국이다. 영국은 2024년 12월 첫 신규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협정은 지금도 확대되고 있다. 올해 5월에는 코스타리카의 가입 협상이 실질적으로 타결됐고, 우루과이는 가입 작업반에서 논의가 진행 중이며, 아랍에미리트와 필리핀, 인도네시아와는 예비 논의가 시작됐다.
회원국들은 같은 협정에 참여하지만 추구하는 이익은 서로 다르다. 일본은 통상규범의 주도권과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중시한다. 싱가포르는 개방적인 무역·금융·물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려 한다. 베트남과 말레이시아는 글로벌 기업의 투자와 생산기지 이전을 유치하고 수출시장을 다변화하려는 동기가 강하고, 브루나이는 에너지 중심 경제에서 벗어나 산업과 교역의 다변화를 추구한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농축산물과 식품 수출의 경쟁력을 활용할 수 있다. 캐나다와 멕시코는 미국 중심의 교역구조를 보완하고 태평양 지역의 시장을 확대하려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칠레와 페루 역시 광물·농수산물 등 자국의 수출품에 대한 시장 접근성을 넓힐 수 있다.
영국의 가입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브렉시트 이후 유럽연합 밖에서 독자적인 통상정책을 추진하는 영국은 인도·태평양 지역과의 경제적 연결을 강화하려 했다. 영국 정부는 CPTPP 가입을 새로운 성장시장에 접근하고 국제 무역규칙의 형성에 참여하는 기회로 설명했다.
이처럼 CPTPP는 회원국 모두가 동일한 이익을 얻는 협정이 아니다. 어떤 국가는 제조업을, 어떤 국가는 농업을, 또 다른 국가는 금융과 서비스를 통해 기회를 얻는다. 따라서 협정이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것과 개별 산업에 이익이 되는 것과 구분해서 판단해야 한다.
CPTPP의 국제정치적 성격을 가장 흥미롭게 보여주는 사례는 중국이다. 2021년 9월 중국은 CPTPP 가입을 공식 신청했다. 미국이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대응하기 위해 발전시킨 통상체제에 중국이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중국의 전략은 몇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아시아·태평양 경제통합 과정에서 배제되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 둘째, 미국이 참여하지 않는 협정에 가입함으로써 지역 경제질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 셋째, 높은 수준의 통상규범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면서 자국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의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가입은 간단하지 않다. CPTPP는 국영기업의 경쟁조건, 노동, 디지털무역 등에서 높은 수준의 규범을 요구하며, 중국의 경제제도와 충돌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신규 회원국 가입에는 기존 회원국들의 합의도 필요하다. 실제로 신청 후 5년이 지나도록 중국과 대만에 대해서는 가입이 승인되지 않았다.
여기서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차이가 드러난다. 미국은 자국의 경제력을 활용한 관세와 양자협상에 무게를 두는 반면, 중국은 기존 다자간 경제협정에도 참여하면서 통상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물론 신청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만으로 중국이 협정의 모든 규범을 수용할 준비가 됐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CPTPP가 더 이상 미국과 중국의 단순한 대립구도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은 회원국이 아니고 중국은 가입 신청국이며, 일본과 호주 등 기존 회원국들은 중국과 긴밀한 무역관계를 유지하면서도 CPTPP의 규범을 지키려 한다. 국제통상 질서가 국가 간의 정치적 대립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은 수출을 통해 성장해 온 국가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기계, 화학제품 등 주요 산업이 해외시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 세계 무역환경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미국의 관세정책, 미·중 갈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 경제안보의 중요성 확대 등으로 자유무역의 원칙만으로 시장 접근을 보장받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CPTPP는 한국에 새로운 전략적 선택지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CPTPP 12개국 가운데 10개국과 개별 협정을 맺고 있다. 협정이 없는 나라가 둘 있다. 일본과 멕시코다. 규율 범위가 나라마다 다른 기존 협정의 틈을 메우고, 회원국 간 원산지 누적기준을 활용하며, 공급망을 연결하고, 향후 통상규범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입론의 핵심이다.
국가 전체의 경제적 이익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는 반면 농업에서는 생산 감소가 예상된다. 그렇다면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되는 정책이라면 일부 산업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여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경제적 효율성만으로 내릴 수 없다.
한국 농업은 제조업과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경지면적이 좁고 농가의 경영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으며, 농업인의 고령화와 농촌 인구 감소가 진행되고 있다. 인건비와 농자재 가격의 상승도 농가 경영을 압박한다. 반면 CPTPP 회원국 중에는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칠레처럼 대규모 농업과 농축산물 수출에 경쟁력을 가진 국가들이 포함돼 있다. 물론 이들 국가의 모든 농산물이 한국 농산물보다 저렴한 것은 아니다. 품목별 생산비, 운송비, 환율, 품질, 검역조건에 따라 경쟁력은 달라지고, 한국이 이미 체결한 FTA에서 상당한 관세 인하가 진행된 품목도 있다. 그럼에도 농민들이 우려하는 것은 추가적인 개방이 누적될 때 발생할 충격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식량안보다. 농산물은 일반 공산품과 다르다. 가격이 낮다고 해서 언제나 해외에서 안정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후변화, 전쟁, 수출규제, 국제 물류의 차질 등이 발생하면 식량 공급은 국가안보의 문제가 된다. 국내 생산기반이 약화된 뒤 이를 복원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다만 식량안보가 곧 모든 농산물을 국내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수입선 다변화 역시 공급망의 안정성을 높이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국내에서 반드시 유지해야 할 생산기반과 해외 조달로 보완할 수 있는 영역을 구분하는 일이다.
농민들이 내건 생존권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경제적·사회적 불안을 담고 있다. 농업계의 불신에는 쌓여온 기억도 있다. 정부 역시 농업계의 우려를 가볍게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농림축산식품부는 8월 27일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될 때 가입이 농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농업계의 예상 피해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분석 결과가 나온 직후인 10월 6일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결론을 정해놓고 서두르지 말고 원점으로 다시 대화하라”고 지시했고, 연내 가입 신청도 보류하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CPTPP 논쟁에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은 국가 전체의 이익과 개별 산업의 이익이다. 자유무역은 국가가 비교우위를 가진 산업에 자원을 집중하고, 소비자가 더 다양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경제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효율성이 높아진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다. 제조업 기업이 수출 증가로 얻는 이익과 농가가 가격 하락으로 입는 손실은 서로 다른 주체에게 발생한다. 더욱이 제조업의 생산 증가가 곧바로 농가의 소득 증가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국가 전체의 경제적 효과가 긍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농업의 손실을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농업에 손실이 발생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산업의 수출 기회와 공급망 다변화 효과를 무시할 수도 없다.
핵심은 이익과 손실을 어떻게 분배하고 조정할 것인가에 있다. 정부가 가입을 추진한다면 농업계에는 단순한 일회성 보상보다 장기적인 생산기반 유지와 소득 안정 대책이 필요하다. 품목별 관세 협상, 농가 소득안전망, 생산비 절감, 농산물의 고부가가치화, 지역 유통체계 개선 등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수출산업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을 어떤 재정적·제도적 방식으로 농업과 농촌의 지속가능성에 연결할 수 있을지도 논의해야 한다. 이러한 조정 장치가 충분하지 않다면 자유무역의 경제적 효과와 관계없이 사회적 갈등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CPTPP는 작은 국가들의 자유무역 실험에서 시작해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경제전략으로 확대됐고, 미국의 탈퇴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새로운 통상질서의 한 축으로 발전했다. 중국은 가입을 신청했고, 영국은 회원국이 됐으며, 코스타리카와 우루과이가 문 앞에 서 있다. 각국은 서로 다른 경제적·전략적 목적을 가지고 이 협정에 접근하고 있다. 한국 역시 수출시장 확대와 공급망 안정, 국제통상 규범 형성에 참여할 기회를 검토하고 있다. 동시에 국내 농업의 생산기반과 농촌 공동체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