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 “비타민으로 알았다” 회사 “자율적 치료”…설명·동의 과정도 쟁점
- 동종 배터리공장 14곳 감독 확대…전·현직 노동자 역학조사 추진
자동차 배터리 제조공장에서 일부 노동자가 ‘비타민 주사’로 알고 맞았다는 주사가 체내 납 배출을 촉진하는 킬레이션 치료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고용노동부는 특수건강진단 직전 킬레이션 주사가 투여된 행위가 노동자의 납 노출 수준을 확인하고 보호하기 위한 절차를 방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DN오토모티브를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경찰 수사와 함께 퇴직자를 포함한 전·현직 노동자의 건강영향을 확인하는 집단 역학조사도 추진된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킬레이션이 실제 치료법인지 여부가 아니다.
작업장의 납 노출을 줄여야 할 상황에서 특수건강진단을 앞두고 약물을 반복적으로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지, 노동자에게 약물의 이름과 목적·위험을 충분히 설명했는지, 투약이 검사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규명하는 데 있다.
다만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 만큼 회사가 건강진단 결과를 조작하거나 납중독을 고의로 은폐했다고 확정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은 해당 주사를 비타민으로 알았다고 주장하는 반면, 회사 측은 비타민 주사라고 설명한 적이 없고 치료도 직원들의 자율적인 선택에 따라 이뤄졌다는 입장이다.

올해 초 제보 접수…4월 감독 결과 공개
관련 의혹에 대한 정부 조사는 올해 1월 말 제보가 접수된 뒤 시작됐다. 노동부는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안전보건감독과 정밀 작업환경측정을 실시했다.
고용노동부 울산지청이 4월 20일 공개한 감독 결과에 따르면 DN오토모티브 울산 1·2공장에서는 모두 88건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사항이 확인됐다. 이 가운데 68건은 사법처리 대상으로 입건·송치됐고, 나머지 20건에는 총 462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됐다.
납 노출 공정에는 4월 21일부터 5월 7일까지 사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68건의 위반사항에 과태료 4620만원이 부과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법처리 대상 68건과 과태료 대상 20건을 합해 모두 88건이 적발됐다는 뜻이다.
노동부는 10월 12일 경찰 수사의뢰와 후속 조사 현황을 추가로 밝혔다.
특수건강진단 직전 킬레이션 치료가 이뤄진 행위가 정부의 건강보호 업무를 방해했다고 보고 회사를 업무방해 혐의로 수사 의뢰했으며, 사건은 울산경찰청이 수사하고 있다.
배터리 제조업체 14곳을 대상으로 한 기획감독도 시작됐다. 노사정이 추천한 전문가 9명으로 ‘DN오토모티브 납 노출 규명과 작업환경 개선위원회’를 구성하고 건강·작업환경·역학조사 등 3개 분과를 운영할 계획이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퇴직자를 포함한 전·현직 노동자 전체를 대상으로 납 노출과 건강영향을 확인하는 집단 역학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킬레이션은 ‘해독 비타민 주사’ 아니다
킬레이션은 납과 같은 금속과 결합하는 약물을 투여해 체외 배출을 돕는 치료다.
실제 납중독 진료에 사용되지만, 납에 노출된 노동자가 정기적으로 맞는 예방주사나 피로회복용 영양주사와는 성격이 다르다.
치료 여부는 혈중 납 농도와 증상, 노출 형태, 환자의 건강상태를 종합해 의사가 판단해야 한다. 사용하는 약물에 따라 투여 방법과 주의사항도 달라진다.
세계보건기구는 혈중 납 농도가 확인되면 노출 경로를 찾아 노출을 줄이거나 끝내는 조치를 우선하도록 권고한다.
킬레이션을 비롯한 구체적인 치료는 환자의 나이와 증상, 혈중 농도 등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
미국 산업안전보건청은 납에 노출되는 노동자의 혈중 농도를 일정 수준 아래로 낮출 목적으로 킬레이션제를 반복 투여하는 ‘예방적 킬레이션’을 금지하고 있다.
치료나 진단 목적으로 사용할 때도 면허를 가진 의사의 감독 아래 적절한 의료기관에서 충분한 검사를 병행하도록 규정한다.
검진 직전 투약, 왜 문제가 되나
혈중 납 검사는 노동자가 최근 어느 정도 납에 노출됐는지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다.
직업성 납 노출 관리에서는 검사 결과에 따라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필요한 경우 노동자를 납 노출 공정에서 일시적으로 분리하는 등의 보호조치를 검토한다.
킬레이션제는 납과 결합해 체외 배출을 촉진하므로 투약 뒤 혈중 농도가 달라질 수 있다. 특수건강진단 직전에 반복적으로 사용됐다면 검사 결과가 노동자의 평소 노출 상태를 제대로 반영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투약이 실제 검사 결과를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회사가 이를 의도했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투약 전후 혈중 납 농도와 약물의 종류·용량·투여 시점, 검진기관이 투약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등을 경찰 수사와 역학조사에서 밝혀야 한다.
MBC는 입수한 회사 내부 문건에 일부 노동자의 이름과 추가 투약 대상, 투여 횟수, 검진 일정이 기재돼 있었다고 보도했다. 노동자들은 회사 측 안내에 따라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다고 주장했다. 회사 측은 투약을 강제하지 않았으며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치료였다는 입장이다.
정확한 약물 성분과 설명·동의 여부 확인해야
킬레이션 치료에는 여러 약물이 사용될 수 있다. 각 약물은 적용 대상과 투여 방법, 부작용이 다르기 때문에 이번 사건에 특정 성분의 위험을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현재 공개된 자료만으로는 실제 투여된 약물의 정확한 성분과 용량, 투약 대상자를 정한 의학적 기준이 충분히 확인되지 않는다. 병원의 진료기록과 처방·투약 내역을 통해 밝혀야 할 부분이다.
킬레이션제는 약물에 따라 신장기능 저하, 체내 필수 미네랄 변화, 위장관 증상이나 피부 반응 등을 일으킬 수 있어 사전 검사와 의료진의 관찰이 필요하다.
미국 산업안전보건청도 직업성 납중독에 사용하는 킬레이션제에는 상당한 부작용 가능성이 있어 치료로 얻을 이익과 위험을 개별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약물을 투여하기 전에는 노동자에게 약물의 이름과 목적, 예상되는 이익과 위험, 다른 선택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받았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건강관리 주사’나 ‘비타민 주사’ 정도의 설명만으로는 킬레이션 치료의 성격을 충분히 알렸다고 보기 어렵다.
납 노출 관리의 출발점은 작업환경 개선
납은 축전지 제조·재활용과 금속 가공 등에서 직업적으로 노출될 수 있다.
체내에 들어오면 신경계와 혈액 생성 과정, 신장, 심혈관계 등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뼈에도 장기간 축적될 수 있다.
납 노출은 초기에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피로와 두통, 복통, 집중력 저하처럼 다른 질환에서도 나타나는 증상만 보이기도 한다. 증상이 없더라도 작업환경 관리와 정기적인 혈중 납 검사가 필요한 이유다.
직업성 납 노출을 줄이려면 공기 중 납 농도 측정과 환기·밀폐, 공정 개선, 적절한 보호구 사용, 작업복 분리 보관·세탁, 샤워시설 확보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작업복과 신발에 묻은 납 먼지가 가정으로 옮겨지지 않도록 하는 조치도 필요하다.
혈중 납 농도가 높아졌을 때도 먼저 해야 할 일은 노출 원인을 찾아 줄이거나 중단하는 것이다.
약물로 혈중 수치를 낮춘 뒤 같은 환경에서 계속 일하도록 하는 방식은 작업환경 개선을 대신할 수 없다.
전·현직 노동자 조사, 과거 노출까지 살펴야
집단 역학조사에서는 현재의 혈중 납 농도만 확인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과거 검사 결과와 근무기간, 담당 공정, 작업장 공기 중 납 농도, 보호구와 환기시설 사용 여부, 킬레이션 투약 기록을 함께 살펴야 한다.
현재 수치가 낮다고 과거에 납 노출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납은 혈액뿐 아니라 뼈 등에 축적될 수 있고, 노출 시점과 검사 시기에 따라 혈중 농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투약받은 노동자에게 이상 증상이 나타났는지, 신장기능과 혈액검사 결과에 변화가 있었는지, 투약하지 않은 노동자와 차이가 있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퇴직자를 조사 대상에 포함한 것은 과거 직업성 노출과 장기적인 건강영향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노동자는 검사·투약 기록 확인해야
납 노출 공정에서 근무했거나 킬레이션 주사를 맞은 노동자는 자신의 특수건강진단 결과와 혈중 납 검사 기록, 처방·투약 기록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투여받은 약물의 이름과 용량, 투약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해당 의료기관에 진료기록과 처방 내역을 요청할 수 있다. 과거와 비교해 혈중 납 농도가 크게 달라졌거나 신장·혈액검사에 이상이 있다면 직업환경의학과 등에서 상담받는 것이 좋다.
이번 사건은 특정 주사의 효능이나 부작용만을 둘러싼 문제가 아니다.
노동자가 자신이 어떤 유해물질에 노출됐고 어떤 치료를 왜 받는지 알 권리, 특수건강진단이 실제 노출 상태를 제대로 포착했는지를 묻는 산업보건 문제다.
경찰 수사와 역학조사를 통해 실제 사용 약물과 투여 경위, 설명·동의 과정, 검사 결과에 미친 영향과 노동자의 건강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동종 배터리 사업장에서도 환기와 보호구, 건강진단 운영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점검하고, 약물 투여가 작업환경 개선을 대신하지 못하도록 관리 기준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