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욱의 푸드칼럼] 토마토 8. 겨울을 준비하는 김장, 여름을 저장하는 토마토 소스

한국과 이탈리아 남부의 닮은 듯 다른 저장 음식 문화

16세기 전래, 그리고 200년의 낯섦과 적응

계절을 저장하고 사람을 묶어주는 지혜

남부 이탈리아 가정의 토마토 준비, AI 생성

 

한국과 이탈리아 남부의 닮은 듯 다른 저장 음식 문화

 

한 나라의 음식 문화를 들여다보면 그들이 자연의 순환을 어떻게 이해하고 삶을 가꾸는지 알 수 있다. 풍요로운 제철의 맛을 저장해 다가올 계절을 견디는 일은 인류 공통의 숙제였다. 멀리 떨어진 한국과 이탈리아 남부 역시 '음식을 보관해 계절을 대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의 '김장'과 이탈리아 남부의 '토마토소스 만들기'다.

 

16세기 대항해 시대는 ‘식탁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오늘날 한국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붉은 맛의 핵심, 고추와 토마토가 바다를 건넌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놀랍게도 두 식재료가 각국에 들어와 삶 속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은 신기할 만큼 비슷하다.

 

16세기 전래, 그리고 200년의 낯섦과 적응

 

토마토가 이탈리아에 처음 들어온 것은 1540년대 전후였고, 고추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전후인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였다. 신대륙에서 건너온 이 외래 식재료들은 처음에는 대접받지 못했다. 유럽인들은 토마토를 독성이 있는 '독사과'나 관상용 식물로 여겨 기피했고, 조선에서도 고추의 강한 매운맛과 독성을 경계해 한동안 요리에 선뜻 쓰지 못했다.

 

두 식재료가 오해를 벗고 대중의 식탁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까지는 대략 2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18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토마토를 으깨 소스로 만드는 법이 대중화되었고, 한국 역시 18세기에 이르러 고춧가루와 젓갈을 활용해 담그는 붉은 김치 레시피가 등장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지리적·기후적 환경에 적응하며 마침내 각 나라의 대표 저장 음식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여름의 태양을 병 속에 담다

 

한국인에게 늦가을 김장이 긴 겨울을 준비하는 것이라면,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풀리아, 시칠리아 등에서는 8월 말에서 9월 초가 되면 온 마을이 붉은빛으로 물든다. 태양 에너지를 머금은 완숙 토마토가 가장 맛있고 저렴하게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되면 온 가족과 친척이 모여 대대적인 토마토소스 작업에 착수한다. 잘 익은 토마토를 씻고, 끓는 물에 데쳐 껍질을 벗긴 뒤, 씨를 털어내고 으깨어 매끄러운 퓨레 형태로 만든다. 전통 방식 그대로 수동 기계나 체를 이용해 소스를 짜내고, 소독된 유리병에 채워 밀봉한 뒤 커다란 솥에서 삶아 살균한다. 이때 각 가정마다 풍미를 더하기 위해 생바질이나 마늘을 첨가하기도 한다.

 

이렇게 완성된 소스는 지하실에 차곡차곡 쌓여 1년 동안 보관된다. 한국인들이 장독대에서 김치를 꺼내듯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하실에서 토마토소스 병을 꺼내 사용한다. 이 소스는 파스타, 피자, 스튜 등 매일의 식탁을 책임지는 바탕이 된다. 겨울 식탁 위에서 피어나는 여름 태양의 향기와 풍미, 그것이 그들이 한 해의 맛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방식이다.

 

계절을 저장하고 사람을 묶어주는 지혜

 

김장과 토마토소스 만들기는 재료와 요리법이 다르지만, 본질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첫째, 제철 재료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보관한다는 점이다. 한국은 추운 겨울을 대비해 늦가을 배추와 무를 양념에 버무려 발효로 채소를 보존한다. 반면 이탈리아 남부는 햇빛이 고조에 달한 여름 끝자락에 토마토의 산미와 감칠맛을 병 속에 완벽히 봉인한다. 두 문화 모두 제철의 영양과 맛을 사계절 내내 유지하려는 지혜에서 출발했다.

 

둘째, '공동체적 노동'을 통해 관계를 확인하는 매개체라는 점이다. 수십 포기의 배추를 다루는 김장은 온 가족이 때로는 이웃과 친척이 함께 모여야 했다. 이탈리아 남부의 토마토소스 작업 역시 온 가족이 제각기 역할을 맡는다. 어른들은 뜨거운 솥을 다루고, 아이들은 토마토를 씻거나 병을 옮긴다. 이 노동 과정은 단순히 식량을 확보하는 행위를 넘어, 가족 간의 우애를 확인하고 연대감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하는 생생한 교육의 장이다.

 

 

토마토 스파게티

집집마다 다른 "우리 가족의 레시피"

 

"김치 맛은 집집마다 다르다"는 말처럼 이탈리아 남부에서도 "우리 집 토마토소스"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기본 재료는 단순하지만 디테일에는 가정마다 취향이 반영된다. 어떤 집은 순수한 토마토만으로 만들고, 어떤 집은 생바질 잎이나 마늘을 넣어 풍미를 입히며 소금의 양을 다르게 하기도 한다. 캄파니아 지역 사람들은 단맛이 강한 산 마르차노 토마토만을 고집하는 등 품종 선택에서도 자부심이 드러난다.

 

이러한 다양성은 한국의 김장과 닮아 있다. 남도식 김치처럼 젓갈을 듬뿍 넣는 집이 있고 깔끔한 이북식 김치를 선호하는 집이 있듯, 이탈리아 남부의 소스 역시 각 가정과 지역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담고 있다.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날 마트에 가면 공장제 토마토소스와 포장 김치를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다. 굳이 고된 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이들이 이 전통을 이어가는 이유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부모의 손맛을 기억하고 자녀에게 되물려주는 일, 온 가족이 모여 땀을 흘리고 음식을 나누는 추억, 그리고 자연이 선사한 계절의 선물에 대한 깊은 존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치가 겨울을 견디게 해주는 한국인의 지혜라면, 토마토소스는 여름의 햇살을 응축해 두는 이탈리아 남부의 지혜다. 서로 다른 땅에서 태어났지만 두 문화가 식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같다. 가장 좋은 계절의 맛을 기억하고,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며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것. 이것이 음식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힘이다.

 

 

[이탈리아 전문 칼럼니스트]

김성욱 대표

(뽀모도로플러스39)

작성 2026.09.05 17:13 수정 2026.09.05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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