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회사는 남녀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선언만으로 조직의 고용평등 수준을 설명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남녀가 얼마나 채용됐는지뿐 아니라 어느 직급에서 일하고 있는지, 임금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를 데이터로 확인하는 ‘고용평등공시제’가 2027년 도입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구상하는 핵심은 기업과 공공기관의 성별 고용·임금 현황을 투명하게 공개해 조직 스스로 격차를 발견하고 개선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숫자가 공개된다고 곧바로 성평등한 일터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시된 격차가 왜 발생했는지 분석하고 실제 인사·고용제도의 개선으로 연결할 수 있느냐가 제도의 성패를 가를 전망이다.
2027년 고용평등공시제 추진…아직 시행 중인 의무제도는 아니다
성평등가족부는 지난 7월 14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고용평등공시제 공동기획단’을 출범시키고 2027년 제도 시행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공동기획단은 기업과 공공기관의 성별 고용·임금 현황을 체계적으로 공시하고 기업의 자율적인 격차 개선을 지원할 제도적 기반을 만드는 전담조직이다. 공시시스템 구축과 고용평등전문기관 운영 기반 마련, 기업 대상 안내·홍보, 기존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A) 업무의 이관 준비 등을 추진한다.
정부는 2023년부터 공공부문을 대상으로 고용과 임금 비율을 공개하는 ‘성별근로공시제’를 시범 운영해 왔다. 이를 토대로 공시항목을 개편하고 민간기업까지 범위를 넓혀 2027년 고용평등공시제를 공식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현시점에서 기업에 새로운 공시 의무가 이미 부과된 것은 아니다. 정부는 「양성평등기본법」 개정 등을 통해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으며 국회 입법절차와 세부 운영기준 마련이 남아 있다. 대상 기업의 범위와 구체적인 공시방식 등은 최종 법령과 운영기준을 확인해야 한다.
직원 수만 보는 공시 아니다…‘어디에서 격차가 생겼는지’가 핵심
정부가 올해 하반기 업무계획에서 제시한 고용평등공시제의 방향을 보면 단순히 전체 남녀 직원 수를 공개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성평등가족부는 직종·직급별 근로자 수와 고용형태별 남녀 평균·중위임금 비율 등 성별 고용·임금 현황을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정보가 중요한 이유는 전체 직원의 성비만으로 조직의 고용구조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입사원 채용에서는 남녀 비율이 비슷하더라도 과장·부장급으로 올라갈수록 한쪽 성별이 급격히 줄어들 수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성별 구성에 큰 차이가 있거나 특정 직종과 직급에 한쪽 성별이 집중될 수도 있다.
공시는 이처럼 조직 안에서 ‘누가 입사했는가’뿐 아니라 ‘어디에서 일하고 어떤 보상을 받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기업의 인사담당자에게도 의미가 작지 않다. 공시가 시행되면 채용·배치·승진·임금 데이터를 성별로 분리해 관리할 수 있는지, 기존 인사정보시스템에서 필요한 자료를 정확하게 산출할 수 있는지부터 점검해야 할 가능성이 커진다.
성별 임금격차 29%…그러나 ‘29%=직접 차별’은 아니다
정부가 고용평등공시제를 추진하는 배경에는 한국의 큰 성별 임금격차가 있다.
성평등가족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근거로 우리나라의 2024년 성별 임금격차가 29%라고 밝혔다. 정부는 이를 개선하기 위한 국정과제의 하나로 고용평등공시제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평균임금의 성별 차이가 확인됐다고 해서 그 차이 전체를 곧바로 직접적인 성차별의 결과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직종과 직급, 근속기간, 근로시간, 고용형태, 경력단절 등 여러 요인이 임금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특정 기업의 성별 임금격차가 평균보다 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기업을 ‘성차별 기업’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그렇다고 숫자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시의 가치는 ‘격차가 몇 %인가’에서 멈추지 않고 ‘왜 이런 격차가 발생했는가’를 조직이 설명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숫자를 공개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피플소사이어티가 주목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고용평등공시제가 단순한 통계 공개에 머문다면 기업에는 새로운 행정업무 하나가 추가되는 데 그칠 수 있다. 반대로 공시 결과를 근거 없이 기업의 차별 여부를 판정하는 자료처럼 사용하면 제도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채용 단계의 남녀 비율은 비슷하지만 10년 뒤 여성 관리자 비율이 크게 낮아진 기업이라면 어느 시점에서 격차가 벌어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산·육아 시기의 이탈이 많은지, 승진 과정에서 차이가 나타나는지, 특정 직무에 성별 편중이 있는지 등을 추가로 분석해야 한다.
임금도 마찬가지다. 평균임금 격차를 확인한 뒤 직급·고용형태·근속기간 등을 함께 살펴야 원인에 가까이 갈 수 있다.
결국 공시자료는 기업을 줄 세우는 ‘성적표’라기보다 조직 내부의 구조적 차이를 찾아내기 위한 진단자료로 활용될 때 정책 효과가 커질 수 있다.
기업 부담은 줄이고, 공시 이후 개선은 연결해야
제도 시행 과정에서는 기업의 행정부담과 공시의 실효성을 함께 풀어야 한다.
이미 일정 기업은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A)를 통해 여성고용 현황 등을 관리하고 있다. 새로운 제도가 기존 제도와 중복돼 같은 자료를 여러 차례 제출하도록 한다면 현장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정부도 이 문제를 고려해 기존 적극적 고용개선조치 업무와의 연계를 준비하고 있다. 공동기획단은 공시시스템 구축과 함께 기업이 자신의 고용구조를 점검할 수 있는 자가진단 도구, 전문 컨설팅, 인센티브 지원방안 등을 마련할 계획이다.
공시가 실제 변화를 만들려면 지원체계도 중요하다. 격차를 발견한 기업이 원인을 분석할 수 있는 도구가 없거나 개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공개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업의 부담을 줄이는 데만 집중해 공시항목이 지나치게 단순해진다면 어느 직급과 고용형태에서 격차가 발생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행정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실제 격차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는 설계가 필요한 이유다.
기업이 지금 확인할 것은 ‘우리 데이터를 설명할 수 있는가’
고용평등공시제는 아직 세부 내용이 모두 확정된 제도가 아니다. 따라서 기업이 지금 당장 새로운 법정 공시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단계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다만 2027년 도입을 목표로 정부가 공동기획단까지 출범시키고 공시시스템과 전문기관, 법적 근거 마련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업의 인사·노무 담당자도 제도화 과정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특히 현재 보유한 인사데이터만으로 직종·직급·고용형태별 성별 구성과 임금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지, 격차가 나타날 경우 그 원인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지를 미리 점검할 수 있다.
고용평등공시제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기업을 바라보는 질문도 달라진다.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선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채용되고, 어느 직급까지 성장하며, 어떤 형태로 고용되고,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받는지를 데이터로 설명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다만 숫자는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성별 격차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단정해서도, 여러 원인이 있다는 이유로 격차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공개된 데이터를 통해 원인을 확인하고 불합리한 구조가 있다면 개선하는 것, 그것이 고용평등공시제가 2027년 실제 제도로 안착하기 위해 넘어야 할 핵심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