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의 찬바람 속에 섞인 아잔 소리와 캐럴
거리마다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가 딸랑이고, 화려한 트리 불빛이 밤거리를 수놓는 12월이다. 믿지 않는 이들조차 왠지 모를 설렘에 젖어 드는 이 계절, 중동의 황량한 도시 거리를 떠올린다. 그곳에는 12월이 되어도 캐럴이 울리지 않는다. 대신 하루 다섯 번, 모스크의 첨탑에서 울려 퍼지는 '아잔(Adhan)' 소리만이 건조한 대기를 가른다. 성탄절 아침, 무슬림들이 사는 거리에서 귓가에 스치던 그 아잔 소리는 묘한 긴장감과 함께 깊은 연민을 자아내곤 했다.
많은 기독교인은 무슬림이 예수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적대시한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무슬림 친구들은 놀랍게도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들은 예수를 '이싸'라고 부르며, 그 이름 뒤에, 다른 예언자들에도 붙이는 표현인 "알라이히 쌀람(그에게 평화가 깃들기를)"이라는 존칭을 붙인다. 그렇다면, 과연 무슬림들에게 예수의 탄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믿는 성탄의 밤과 그들이 기억하는 예수의 탄생 사이에는 어떤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을까?
꾸란이 기억하는 그 밤: 동정녀 탄생의 기적
놀랍게도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예수의 탄생을 꽤 상세하게 다룬다. 아니, 오히려 성경보다 더 신비롭게 묘사하는 부분까지 있다. 꾸란 제19장 '마리아(Maryam)의 장'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여기에는 동정녀 탄생의 기사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경 누가복음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수태를 알리듯, 꾸란에서도 천사가 나타나 "거룩한 아들"을 주겠다고 말한다. 마리아가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아들을 낳으리이까?"라고 묻는 장면은 성경과 꾸란이 마치 쌍둥이처럼 닮았다.
무슬림들은 말한다, "우리도 예수가 남자의 개입 없이, 알라의 기적적인 입김(Ruh)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분은 아주 특별한 예언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슬림들에게도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는 놀라운 표적'이다. 그들도 예수가 죄 없이 기적을 통해 태어났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언제나 가슴 벅찬 접촉점이 된다. 우리는 적어도 '예수의 탄생이 초자연적 기적'이라는 사실 앞에서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야자수 아래와 말구유: 결정적 차이의 시작
하지만, 그 유사함의 껍질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우리는 건널 수 없는 깊은 신학적 바다를 마주하게 된다. 성경 속 마리아는 만삭의 몸으로 베들레헴의 냄새 나는 마구간에 도착해, 누울 곳이 없어 짐승의 먹이통인 구유에 아기 예수를 뉘었다. 이것은 철저한 낮아짐, 즉, '성육신(Incarnation)'의 겸손을 상징한다.
반면, 꾸란 속의 마리아는 산기를 느끼자, 종려나무(야자수) 아래로 홀로 피신한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할 때,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요람에서 말한다. "슬퍼하지 마라. 주님께서 네 발밑에 시냇물이 흐르게 하셨느니라." (꾸란 19:24)
꾸란 속의 아기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요람에서 유창하게 말하며, 어머니의 순결을 변호하고, 자기가 알라의 종이자, 예언자임을 스스로 선포하는 '슈퍼 베이비'다. 바로 여기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이슬람의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강력한 능력을 갖춘, 기적을 행하는 '위대한 예언자'로서의 면모가 강조된다. 하지만, 성경의 예수는 철저히 무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어머니의 젖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
무슬림들에게 예수의 탄생은 '위대한 예언자의 등장'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배 속에서 열 달을 웅크리고 있다가, 피 묻은 살덩이로 이 땅에 떨어지신 그 처절한 자기 비하. 바로 이것이 성탄의 핵심이다. 무슬림들은 "알라는 위대하다(Allahu Akbar)"고 외치며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기에, 신이 인간처럼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아기가 된다는 사실을 신성모독으로 느낀다. 그들에게 성육신은 불가능한 신화일 뿐이다.
말씀이 된 육신 vs 책을 받은 예언자
무슬림들과 대화하면서 이해가 안 되는 순간은 그들이 예수를 '알라의 말씀'이라고 부르면서도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를 때이다. 꾸란 4장 171절은 예수를 '알라의 말씀'이라고 기록한다. 성경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선포하는 것과 기묘하게 연결된다.
그러나, 꾸란에서 예수가 '말씀'인 이유를 이슬람 학자에게 물어보면, 예수가 알라의 창조 명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거나, 혹은, 알라의 메시지를 담은 그릇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는 ‘복음서’라는 책을 알라로부터 받아온 전달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모든 기독교인은 예수가 단지 책을 배달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말씀 그 자체'가 되어 우리에게 오셨음을 믿는다.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복음은 책이 아니라 인격이다.
우리는 무슬림 친구들에게 종종 이렇게 비유를 나눈다. "사랑하는 친구여, 왕이 백성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도 큰 은혜네. 하지만 왕이 왕복을 벗고 평민의 옷을 입고, 백성들의 찢어지는 가난과 고통 속으로 직접 들어와 같이 사는 것. 그것이 더 큰 사랑 아닌가? 편지는 정보를 주지만, 함께 사는 왕은 생명을 준다네."
그러므로, 무슬림들에게 예수의 탄생은 존경할 만한 예언자의 생일이지만, 구원자의 오심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려졌다고 믿는다. 탄생의 목적이 '대속의 죽음'에 있다는 것을 그들은 거부한다. 그래서 이슬람의 크리스마스(만약 그들이 기념한다면)에는 십자가의 그림자가 없다. 십자가 없는 성탄, 그것은 팥 없는 찐빵 정도가 아니라, 생명 없는 인형과도 같다.

잊힌 환대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사명
성탄절이 되면 우리는 가끔 척박한 땅 팔레스타인의 베들레헴을 생각한다. 오늘날 그곳은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무슬림과 유대인 사이의 긴장이 팽팽하다. 하지만 2천 년 전, 그 땅에 오신 아기 예수는 모든 담을 허물기 위해 오셨다.
무슬림들은 예수를 '심판의 날에 다시 올 재림의 주'로 기다린다. 물론 그들이 기다리는 재림 예수는 이 땅에 다시 와서 전 세계를 이슬람화할 예언자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그들도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고 있다.
기독교인은 이 지점에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기독교인은 과연 무슬림들보다 더 간절히 오실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가?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 번 땅에 머리를 대고 기도하며 알라에게 복종하려 애쓴다. 비록, 그들의 열심은 빗나간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그 뜨거움만큼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덥지도 않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을 부끄럽게 한다.
오늘날 전 세계 약 18억 무슬림들에게 예수의 탄생은 '미완의 계시'다. 그들은 예수를 아는 걸로 말하지만, 진짜 예수를 알지 못하며 살아간다. 마치 보물 지도를 손에 쥐고도 보물이 묻힌 곳을 파보지 않는 것과 같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기적의 입구까지는 왔으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원의 안방으로 들어오지 못한 그들. 그들에게 예수의 탄생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이자, 존경은 하되, 구원은 없는 역사적 사실에 머물러 있다.
그들에게 별이 되어야 할 우리
그러므로, 성탄절은 우리만의 축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화려한 트리 밑에서 선물을 주고받으며 기뻐할 때, 수많은 무슬림은 예수를 단지 '훌륭했던 옛 예언자'로만 기억하며 구원의 문턱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논쟁이나 비난이 아니다. 왕궁을 버리고 냄새나는 구유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그 '처절한 사랑', 그 '낮아짐의 영성'을 보여줄 우리의 삶이다.
무슬림들은 기독교의 교리에는 반감을 보이지만, 예수의 사랑(Love)을 실천하는 기독교인의 삶 앞에서는 마음을 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성탄의 의미는 명확하다.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에서 군림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 자녀인 우리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온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번 성탄절에는 기독교인들의 기도가 베들레헴의 별처럼 무슬림들을 향해 비추어져야 한다. 예수의 탄생은 무슬림들에게 아직 '봉인된 편지'다. 그 봉인을 뜯고 생명의 말씀을 읽게 하는 것, 그것이 먼저 그 사랑을 입은 기독교인들이 짊어져야 할 거룩한 빚이다. 2천 년 전, 냄새나는 마구간의 구유가 온 세상을 품었듯, 모든 기독교인의 가슴이 우리 주변의 무슬림을 품어야 할 때다.
무슬림들은 예수를 '예언자'라 부르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들에게 예수가 '생명'임을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