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일보 = 화담일보기자] [화담일보]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 이른바 CBAM이 철강과 알루미늄 원재료에서 자동차부품·가전 같은 하류제품으로 넓어질 전망이다. 산업통상부는 10월 23일 설명회에서 2028년 1월부터 하류재에 탄소비용이 부과될 수 있다고 안내했다. 완성품으로 규제를 우회하는 일을 막겠다는 유럽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 대상 품목은 아직 유럽 내부 개정 절차가 끝난 뒤 확정될 사안이다. 우리 기업에 필요한 것은 막연한 공포나 낙관이 아니라 어떤 자료를 언제부터 준비해야 하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와 공급망 전체가 감당할 수 있는 지원이다.
하류재의 탄소량을 계산하는 일은 원재료보다 복잡하다. 하나의 자동차부품에는 여러 국가와 기업에서 생산된 철강·알루미늄, 가공 공정과 전력이 얽혀 있을 수 있다. 완성품 기업이 자신의 공장 배출만 계산해서는 제품에 내재된 탄소를 설명하기 어렵다. 협력사가 제공한 수치의 경계와 측정 시점, 재생전력 사용 여부, 재활용 원료 비중이 맞물린다. 같은 부품이라도 공급처나 생산 시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결국 CBAM 대응은 환경부서 한 곳의 보고서 작성이 아니라 구매·생산·품질·수출 부서가 함께 다뤄야 하는 데이터 관리 문제가 된다.
대기업은 전문인력과 해외 법인을 통해 제도 변화를 추적할 수 있지만 중소 협력업체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납품처가 갑자기 탄소배출 자료를 요구하면 측정설비와 컨설팅 비용, 검증 책임을 협력사에 떠넘길 가능성이 있다. 자료 형식이 구매기업마다 다르면 같은 공정 정보를 여러 번 가공해야 한다. 납품 단가에는 반영되지 않은 채 증빙 의무만 늘어날 수도 있다. 공급망의 가장 약한 곳이 정확한 수치를 제공하지 못하면 완성품 기업도 신뢰할 만한 신고를 할 수 없다. 중소기업 지원은 선의의 배려가 아니라 수출 경쟁력을 위한 필수 투자다.
정부는 우선 확정된 사실과 협상 중인 내용을 구분해 알려야 한다. 산업부 자료에 따르면 2028년 확대 방향은 제시됐지만 최종 품목 목록은 EU의 개정 절차가 완료된 뒤 정해진다. 이 단계에서 특정 품목이 반드시 포함되거나 제외된다고 단정하면 기업이 잘못된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가능한 시나리오별로 적용 가능성이 높은 품목과 필요한 데이터, 확정 일정을 정리하고 변경될 때마다 같은 창구에서 갱신해야 한다. 설명회 참석자 수보다 기업이 최신 규칙을 놓치지 않는 전달체계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탄소량 산정 기준의 공통화도 서둘러야 한다. 기업별로 제각각인 계산표를 만들면 검증 비용이 커지고 숫자의 비교 가능성이 떨어진다. 업종별 표준 양식과 데이터 사전을 마련하고, 원료 공급자가 한 번 입력한 자료를 필요한 범위에서 여러 거래 단계가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다만 영업비밀과 거래정보가 경쟁사에 노출되지 않도록 접근권한을 세분화해야 한다. 탄소 데이터 플랫폼을 만든다는 이름으로 모든 거래정보를 한곳에 모으는 것은 새로운 보안 위험을 낳을 수 있다. 최소한의 정보, 명확한 이용 목적, 기록되는 접근 이력이 함께 설계돼야 한다.
측정과 검증 시장의 품질도 정책의 핵심이다. 수요가 급증하면 검증 인력이 부족해지고 비용이 오를 수 있다. 자격과 책임이 불분명한 컨설팅이 난립하면 기업은 돈을 쓰고도 유럽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료를 만들 위험이 있다. 정부는 국제 기준과의 호환성을 확인하고 검증기관의 역량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중소기업 공동 측정시설, 업종별 전문인력 양성, 초기 진단 바우처처럼 실제 비용을 줄이는 방안을 마련하되 특정 업체에 일감을 몰아주는 구조가 되지 않도록 경쟁과 성과평가를 보장해야 한다.
CBAM을 단지 해외의 무역장벽으로만 규정하는 대응에도 한계가 있다. 탄소누출을 막겠다는 목적과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효과가 함께 나타날 수 있으므로 정부는 국제 규범에 맞는지 따져 협의해야 한다. 동시에 국내 산업의 배출정보 관리 능력을 높이는 일은 어느 시장에서든 필요하다. 유럽의 제도가 늦춰지거나 범위가 줄어들더라도 에너지 효율과 원료 추적성은 기업의 비용 절감과 거래 신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국내 감축 투자가 실제로 제품 경쟁력을 높이는지, 단순한 서류비용만 키우는지 구분해 지원해야 한다.
기업의 반론도 가볍게 볼 수 없다. 확정되지 않은 규정에 맞춰 지금부터 설비와 인력을 투자하면 기준이 바뀌었을 때 매몰비용이 생길 수 있다. 반대로 확정 뒤에 움직이면 공급망 데이터를 모을 시간이 부족하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단계적 대응이 필요하다. 먼저 기존 생산자료로 계산 가능한 범위를 진단하고, 데이터가 없는 공정부터 측정체계를 만들며, 큰 설비투자는 규정 확정과 시장 수요를 확인해 나눠 실행하는 방식이 합리적이다. 정부 지원도 모든 기업에 같은 장비를 보급하기보다 준비 수준과 수출 비중에 맞춰야 한다.
무역정책과 탄소정책의 연결도 분명히 해야 한다. 국내에서 부담한 탄소비용이 유럽 CBAM에서 어떻게 인정되는지는 기업의 이중 부담과 직결된다. 정부는 유럽 당국과 인정 범위와 증빙 방식을 협의하고, 국내 배출권 가격과 무상할당 변화가 수출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설명해야 한다. 환경정책을 수출 지원의 수단으로만 다루면 국내 감축의 신뢰를 잃고, 반대로 산업 비용을 무시하면 생산기지가 빠져나가 탄소누출을 키울 수 있다. 감축의 실효성과 산업의 전환 가능성을 동시에 보는 균형이 필요하다.
원청과 협력사 사이의 공정한 계약 원칙도 마련할 때다. 탄소 데이터 작성과 검증에 필요한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지, 오류가 발견됐을 때 책임을 어떻게 나누는지, 거래 종료 뒤 자료를 어디까지 보관하는지 계약에 명시해야 한다. 구매기업은 협력사에게 불가능한 기한과 무제한 책임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협력사 역시 추정치를 실측값처럼 제출하거나 다른 공장의 수치를 돌려써서는 안 된다. 정부는 표준계약 예시와 분쟁조정 창구를 제공해 정보 요구가 납품단가 후려치기의 새 수단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정책 성과는 몇 차례 설명회를 열었는지가 아니라 공급망의 빈칸이 얼마나 줄었는지로 평가해야 한다. 적용 가능성이 높은 수출기업 중 기본 진단을 마친 비율, 협력사 자료의 재사용 가능성, 검증 비용과 기간, EU 신고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 유형을 익명·집계 형태로 공개하면 지원정책을 개선할 수 있다. 기업의 영업비밀을 보호하면서도 납세자가 지원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를 정해야 한다.
금융지원도 탄소자료의 신뢰성과 연결할 수 있다. 측정설비나 에너지 효율 투자는 초기비용이 커서 주문이 불확실한 중소기업이 선뜻 나서기 어렵다. 정책금융은 단순히 대출 규모를 늘리기보다 실제 감축량과 수출계약의 지속 가능성을 확인해 금리와 보증 조건을 설계해야 한다. 측정값을 과장할 유인이 생기지 않도록 검증기관과 자금지원기관의 역할을 분리하고, 성과가 확인되지 않으면 지원 방식을 수정해야 한다.
2028년은 멀어 보이지만 복잡한 공급망의 데이터를 정리하기에는 길지 않다. 그렇다고 미확정 규칙을 확정된 의무처럼 몰아붙여서도 안 된다. 정부는 최신 규정 번역, 업종별 계산 도구, 검증 인력, 중소기업 비용 지원과 EU 협의를 한 체계로 묶어야 한다. 대기업은 협력사의 준비 비용을 거래조건에 정직하게 반영하고, 중소기업은 지금 가진 생산자료의 품질부터 점검해야 한다. 탄소장벽을 넘는 힘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제품 한 개가 만들어지는 경로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