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서울 정동에 문을 연 손탁호텔은 대한제국 시기 서양식 숙박과 식사, 사교문화가 교차하던 공간이었다. 독일 출신 앙투아네트 손탁이 운영한 이 호텔에는 외교관과 외국인 방문객 등이 드나들었다. 커피는 이러한 접객문화의 한 부분이었다. 손탁호텔의 역사를 따라가면 근대의 커피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는 공간과 어떻게 연결됐는지 살펴볼 수 있다.

1902년 서울 정동에 서양식 2층 건물이 들어섰다. 대한제국 정부가 외국 귀빈을 맞이하기 위해 마련한 손탁호텔이었다.
호텔 2층에는 귀빈용 객실이, 1층에는 일반 객실과 식당,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호텔식 커피문화가 자리 잡는 과정을 보여 주는 장소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손탁호텔에 서울 최초의 호텔식 다방이 설치됐다고 설명한다. 다만 개항 초기 인천의 호텔에도 부속 다방이 있었으므로 손탁호텔을 한국 최초의 커피숍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손탁호텔의 커피가 주목받는 까닭은 음료 자체보다 그곳을 이용한 사람들과 공간의 성격에 있다. 외국 공사관과 대한제국 황실이 가까이 있던 정동에서 커피는 손님을 맞이하고 대화를 나누는 서양식 접객문화의 일부였다.
러시아 공사관을 따라 조선에 온 손탁
손탁호텔을 운영한 앙투아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1854~1925)은 프랑스 알자스로렌 출신으로, 당시 독일 국적을 지니고 있었다.
1885년 러시아 외교관 카를 베베르 일행과 함께 조선에 들어온 손탁은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궁중에서 외국인 접대 업무를 맡았다.
조선이 서구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확대하던 시기, 외국어와 서양식 예절에 익숙한 인력은 궁중의 외빈 접대에 필요했다. 손탁은 이러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었다.
손탁의 활동은 단순한 호텔 경영에 머물지 않았다. 러시아 공사관과 조선 궁중 사이에서 연락과 외교적 교섭에 관여했고, 정동에 마련한 거처는 외국인과 개화파 인사들의 교류 장소가 됐다.
호텔보다 먼저 있었던 정동의 사교 공간
손탁호텔의 역사는 1902년보다 앞서 시작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손탁은 1895년 정동의 가옥과 토지를 하사받았다. 이곳은 외국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용됐으며, 정동구락부와도 연결됐다.
정동구락부는 1890년대 조선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활동한 친미·친러 성향 인사들의 모임이었다. 손탁의 거처는 이들이 교류하던 공간 가운데 하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이듬해 아관파천을 거치며 정동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커졌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은 정동이 단순한 외국인 거주지가 아니라 조선의 외교와 권력 관계가 교차하던 장소였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공간에서 커피는 서양식 생활양식의 일부였다. 다만 정동구락부의 개별 회합에서 누가 어떤 커피를 마셨는지까지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1898년 고종은 손탁에게 방 다섯 개를 갖춘 서양식 건물을 하사했다. 손탁은 이를 서양식으로 꾸며 손탁빈관을 운영했다. 1902년에는 기존 건물을 헐고 더 큰 호텔을 신축했다.
손탁호텔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커피 영업점이 아니라, 손탁의 궁중 활동과 정동의 외교적 환경 속에서 형성된 접객 공간이었다.
1902년 손탁호텔, 커피와 서양식 식탁을 갖추다
1902년 10월 신축된 손탁호텔은 외국 귀빈의 숙박과 접대를 위한 시설이었다.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건립됐으며, 손탁이 운영을 맡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호텔 1층에 주방과 식당, 커피숍이 마련됐다고 기록한다. 2층은 국빈을 위한 객실로 이용됐다.
당시 커피를 마시는 공간은 오늘날의 대중적인 카페와 성격이 달랐다. 손탁호텔은 외교사절과 외국인 방문객을 접대하는 시설이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던 현대식 커피 전문점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호텔의 식당에서는 서양식 음식도 제공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 가운데 하나는 1909년 9월 18일자 영문 신문 《더 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에 실린 호텔 광고다. 당시 운영자가 바뀐 뒤 게재된 광고에는 프랑스 요리와 공식 연회, 결혼식, 피로연 등 여러 접객 서비스가 소개됐다. 서울시의 역사 해설에서도 해당 광고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광고는 손탁호텔이 단순한 숙박시설을 넘어 식사와 사교행사를 제공하는 공간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커피와 함께 어떤 빵이나 케이크를 판매했는지는 별도의 자료가 필요하다. 오늘날 베이커리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뉴를 당시 호텔에서도 제공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한 잔의 커피가 놓인 자리, 외교의 밝음과 어두움
손탁호텔은 외국인들의 사교 장소였지만, 그 역사를 서양식 생활문화의 유입이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는 없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도 이 호텔에 머물렀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강제적인 조약이었다.
손탁호텔은 대한제국이 외국 귀빈을 맞이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지만,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영향력을 확대하던 시대의 현장이기도 했다.
따라서 손탁호텔의 커피문화를 설명할 때는 근대적인 호텔과 식음료 문화의 등장뿐 아니라, 그 공간이 놓였던 정치적 상황도 함께 살펴야 한다.
서양식 식탁과 커피잔이 놓인 호텔에서는 사교와 접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호텔 밖의 대한제국은 외교적 압박과 국권 침탈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처럼 손탁호텔은 새로운 생활문화의 도입과 대한제국 말기의 정치적 현실을 동시에 보여 주는 장소였다.
사라진 호텔, 정동에 남은 기록
손탁은 1909년 호텔 경영권을 넘기고 조선을 떠났다. 이후 손탁호텔은 이화학당에 매입돼 학생 기숙사로 사용됐다.
1922년 호텔 건물은 프라이홀 신축을 위해 철거됐다. 현재 손탁호텔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옛 호텔 터는 서울 정동 이화여자고등학교 일대에 해당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화100주년기념관 지하주차장 입구에 손탁호텔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고 소개한다.

오늘날 정동을 찾는 사람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고, 주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커피는 더 이상 외교관이나 궁중 주변 인물만 접하는 낯선 음료가 아니다.
하지만 손탁호텔의 커피와 오늘날 정동의 카페를 하나의 연속된 영업문화로 볼 수는 없다. 두 시대의 커피는 이용자와 공간의 성격, 소비 방식이 달랐다.
손탁호텔이 남긴 역사적 가치는 한국 최초의 커피숍이라는 수식어에 있지 않다. 대한제국이 외국과 교류하던 정동에서 서양식 식사와 숙박, 사교문화가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 준다는 데 있다.
정동에서 오늘 커피 한 잔을 마신다면, 그 풍경 뒤에 외교와 사교, 그리고 국권을 지키려 했던 대한제국의 역사가 함께 놓여 있음을 기억할 만하다.
다음 편에서는 고종의 커피 음용과 1898년 독살 미수 사건, 덕수궁 정관헌을 둘러싼 일화를 사료와 건축사 연구를 바탕으로 살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