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철학수업 - 8. 질문을 금지하는 공동체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권력이 남는다

성경은 질문을 금지하지 않았다

건강한 공동체는 정답보다 질문을 견딘다

교회 안에서 용기 내어 손을 든 한 사람의 모습은, 질문을 허용하는 공동체가 침묵을 강요하는 공동체보다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상징한다.

8. 질문을 금지하는 공동체 

 

 

 

교회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문장은 의외로 “잘 모르겠습니다”가 아니라 “왜 그렇습니까?”일 때가 있다. 설교의 해석을 다시 묻고, 지도자의 판단에 근거를 요구하고, 교회의 결정 과정이 투명한지 질문하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이유를 묻는 순간 어떤 공동체는 그 질문을 신앙의 성장 과정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떤 공동체는 불순종이나 교만으로 해석한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 “목회자를 의심하면 안 돼”,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질문의 내용에 답하는 대신 질문한 사람의 태도를 심판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질문이 금지되는 공동체가 위험한 이유는 모든 질문이 옳아서가 아니다. 질문 역시 공격적일 수 있고, 왜곡될 수 있으며, 공동체를 해치려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질문 자체를 금지하면 더 중요한 문제가 생긴다. 무엇이 진리인지 검토하는 능력,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 잘못을 수정하는 통로가 함께 사라진다. 공동체는 평온해 보일 수 있지만 그 평온은 합의가 아니라 침묵의 결과일 수 있다.

 

종교 공동체에는 본질적으로 권위가 존재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권위, 예배를 인도하는 권위, 조직을 운영하는 권위가 필요하다. 문제는 권위가 검증되지 않는 권력으로 변할 때다.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구조에서는 지도자의 해석과 하나님의 뜻이 쉽게 동일시된다. “내 판단에 반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등장하는 순간,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아니라 특정 인물이나 조직에 대한 복종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영국 성공회의 세이프가딩 지침은 종교적 맥락의 영적 학대를 정서적·심리적 학대의 한 형태로 설명하면서, 성경이나 영적 권위를 이용한 강압, 침묵 요구, 질문·이견·문제 제기를 막는 검열을 주요 위험 신호로 제시한다. 동시에 특정 신학적 입장을 갖는 것 자체가 학대는 아니며, 핵심은 그 입장을 타인에게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전통적이든 개혁적이든 문제는 견해 그 자체보다 비판과 질문을 봉쇄하는 방식에 있다. 또한 질문을 불편해한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공동체를 ‘영적 학대 공동체’로 규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영적 학대는 반복적이고 체계적인 강압과 통제의 양상이 핵심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소해 보이는 질문 억압을 가볍게 넘겨서도 안 된다. 질문을 한 사람에게 불이익이 돌아가고, 반대 의견이 관계 단절이나 직분 박탈의 이유가 되며, 지도자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영적 죄책감과 연결되는 패턴이 반복된다면 공동체는 이미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질문을 봉쇄하는 조직에서는 구성원들이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을 말하면 안전한가’를 먼저 계산하게 된다. 회의에서는 모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복도와 식탁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공식 언어와 실제 생각이 분리되는 순간 공동체는 진실을 잃는다.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신앙 공동체의 일치는 생각이 모두 같아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품으면서도 진리를 함께 찾는 능력이어야 한다.

 

성경은 질문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욥은 고난의 이유를 묻고, 하박국은 악인이 형통하는 현실을 하나님께 따지듯 질문한다. 시편에는 “어찌하여”, “언제까지”라는 탄식이 반복된다. 도마는 부활 소식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확인을 요구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사실인지 날마다 성경을 살폈다(사도행전 17장 11절). 이런 장면들은 질문이 곧 불신앙이라는 단순한 등식을 흔든다.

 

물론 성경은 모든 의심을 미화하지 않는다. 불신, 냉소, 완고함을 경고하는 본문도 있다. 그러나 질문과 불신은 동일하지 않다. 질문은 진리를 거부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의 존재가 아니라 질문을 어디로 가져가느냐이다. 성숙한 신앙은 질문을 없애는 신앙이 아니라 질문을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 정직하게 가져갈 수 있는 신앙에 가깝다.

 

질문을 금지하면 네 가지 문제가 커질 수 있다. 

 

첫째, 오류가 교정되지 않는다. 지도자의 해석과 판단도 인간의 판단인 이상 실수할 수 있다. 질문이 사라지면 잘못된 결정은 오래 지속된다. 

 

둘째, 책임성이 약해진다. 재정, 인사, 권한 행사에 대한 질문을 ‘불충성’으로 몰아가면 투명성은 줄어든다. 

 

셋째, 상처가 은폐된다.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 공동체의 명예를 이유로 침묵을 요구하면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죄책감을 떠안을 수 있다. 

 

넷째, 다음 세대가 떠난다. 질문할 언어를 가진 청년에게 대답 대신 꾸중만 돌아온다면 그는 신앙의 답을 얻지 못한 채 공동체 자체를 불신하게 될 수 있다.

 

한국갤럽이 2026년 공개한 ‘한국인의 종교 1983-2025’ 조사에서 2025년 한국 성인의 60%가 종교가 없다고 답했고, 20대의 종교인 비율은 24%로 60대 이상 52%보다 크게 낮았다. 비종교인이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 중 13%는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을 꼽았다. 이 수치를 곧바로 ‘질문 억압 때문에 청년이 떠난다’는 증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젊은 세대의 낮은 종교 참여와 종교 제도에 대한 불신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교회가 질문과 비판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더 이상 부차적인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2024년 조사에서도 무종교인 가운데 60%가 종교 가르침에 대한 의문을 매우 또는 극히 중요한 이유로 꼽았고, 47%는 종교 조직에 대한 반감을 중요한 이유로 들었다.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종교적 소속감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한 시사점이다.

 

질문을 허용하는 교회는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이 복음에 충실한지 더 엄격하게 토론하는 공동체다. 건강한 공동체는 “질문하지 마라”가 아니라 “무엇이 궁금한가”라고 묻는다. “목회자를 믿어라”보다 “이 결정의 근거는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교회에 덕이 안 된다”는 말로 덮기보다 피해와 갈등을 공식적으로 제기할 절차를 마련한다. 지도자의 권위를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도 질문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 책임과 견제 장치를 제도화하는 데 있다.

 

실천적으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질문과 반대를 구분하는 문화다. 질문했다고 공동체의 적이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둘째, 지도자에게 “모른다”, “다시 검토하겠다”, “내 판단이 틀릴 수 있다”고 말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지도자가 모든 답을 가진 존재로 연출될수록 공동체는 오히려 위험해진다. 셋째, 신앙 상담과 피해 신고의 통로를 분리하고, 필요하면 공동체 밖의 독립적 기관이나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내부 권위만으로 내부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피해자의 목소리가 다시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탤 수 있다. 질문을 교육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교회학교와 청년 모임에서 ‘정답 맞히기’만 가르치지 말고, 성경 본문을 서로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이유, 역사적 배경을 확인하는 방법, 주장과 근거를 구분하는 법,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태도를 훈련해야 한다. 질문하는 능력은 신앙을 약화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분별을 가능하게 하는 훈련이다. 특히 인터넷과 인공지능을 통해 서로 충돌하는 수많은 종교 정보가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시대에는, 질문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신앙을 보호할 수 없다. 공동체가 질문을 가르치지 않으면 청년들은 공동체 밖에서 혼자 질문하게 되고, 그때 교회는 답을 잃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기회를 잃는다.

 

목회자의 권위도 질문을 견딜 때 더 건강해질 수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권위는 결국 두려움에 의존하지만, 근거를 제시하고 비판을 수용하는 권위는 신뢰를 축적한다. ‘내가 목회자이니 따르라’가 아니라 ‘우리가 왜 이 결정을 내렸는지 함께 살펴보자’고 말할 수 있을 때 권위는 지배가 아니라 책임이 된다. 공동체가 보호해야 할 것은 지도자의 무오류 이미지가 아니라 진실을 말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구조다.

 

신앙은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질문을 견디면서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 그 믿음이 사람을 살리는지 끊임없이 점검하는 과정 속에서 성숙해진다. 하나님이 진리라면 인간의 질문 때문에 진리가 무너질 이유는 없다. 흔들리는 것은 대개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권위다.

 

교회는 질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질문은 공동체를 파괴하기도 하지만, 더 자주 공동체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질문을 막는 교회보다 질문을 안전하게 다루는 교회가 더 강하다. 성숙한 공동체는 모든 질문에 즉시 답하지 못하더라도 질문한 사람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라고 다시 묻고, 함께 성경을 읽고, 사실을 확인하고, 잘못이 드러나면 고친다. 믿음은 침묵을 요구할 때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강해진다.

 

 

삶을 바꾸는 동화 신문 기자 kjh0788@naver.com
작성 2026.09.09 09:24 수정 2026.09.1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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