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통장·집·치료, 누가 결정하나…성년후견 ‘대신 결정’보다 ‘결정 지원’ 먼저

인권위, 성년후견의 ‘대체의사결정’ 한계 짚고 지원의사결정 체계 전환 과제로 제시

가족·후견인·복지·의료 현장부터 쉬운 설명·의사소통 지원 거쳐 당사자 의지 확인해야

별도 지원의사결정 제도가 시행된 것은 아냐…인권위 후속 권고와 제도 개선 논의가 다음 단계

발달장애인이 통장을 어떻게 관리할지, 어디에서 살지, 어떤 복지서비스를 이용할지, 병원에서 어떤 치료를 받을지 결정해야 한다. 의사표현이 어렵다면 가족이나 후견인이 ‘가장 좋은 선택’을 대신 해주면 되는 것일까.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논의가 이 질문을 다시 꺼내고 있다. 핵심은 보호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곧바로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확인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과정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좋은가”에서 “무엇을 원하는가”로

 

현재 성년후견제도는 질병이나 장애, 노령 등의 사유로 사무처리 능력이 부족한 성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후견인이 법률행위와 재산관리 등을 지원하거나 대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문제는 보호를 위한 대리가 당사자가 할 수 있는 결정까지 대신하는 방식으로 확대될 가능성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7월 공개한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보장을 위한 지원의사결정 제도 모색’ 자료집은 이를 ‘대체의사결정’과 ‘지원의사결정’의 차이로 설명한다. 대체의사결정이 “이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가”를 다른 사람이 판단하는 방식이라면, 지원의사결정은 “이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가”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자료집이 제시하는 방향은 후견이나 보호 자체를 무조건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당사자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은 직접 결정하도록 돕고, 어려운 부분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며, 대리결정이 불가피하다면 그 범위를 최소화하자는 것​에 가깝다.

 

말이 어렵다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해선 안 돼

 

이 원칙은 가족과 복지 현장에서 먼저 적용해볼 수 있다. 당사자가 말로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이 선택지를 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료집은 쉬운 언어와 그림·아이콘, 보완대체의사소통기기 등을 활용하고, 당사자가 신뢰하는 가족이나 지원자 등이 정보를 설명하고 숙고를 돕는 방식을 제시한다. 평소 반복해서 보여온 선택이나 가치관, 주거에 대한 선호 등도 당사자의 뜻을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가족과 후견인은 결정을 앞두고 먼저 ‘본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했는가’, ‘본인의 선택과 선호를 확인했는가’, ‘할 수 있는 결정까지 대신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복지사와 장애인복지기관 종사자에게도 같은 질문이 적용된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편리하거나 안전하다고 판단한 선택과 이용자가 원하는 삶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거·돌봄·복지서비스를 결정할 때도 당사자의 선택을 먼저 확인하고 필요한 의사소통 지원을 제공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의료진·후견인도 ‘결정 능력 없음’부터 단정하지 않아야

 

의료 현장에서는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치료와 같이 생명·신체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결정은 충분한 설명과 동의가 중요한 만큼,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가족이나 후견인의 결정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후견인 역시 역할을 ‘대신 결정하는 사람’으로만 이해하기보다, 가능한 범위에서 당사자가 스스로 선택하도록 지원하는 사람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자료집이 소개한 지원의사결정의 원칙도 지원이 대표·대리에 우선하고, 부족한 부분만 제한적으로 보완하는 것​에 무게를 둔다.

 

다만 중증·최중증 장애로 당사자의 의사를 확인하기 매우 어렵거나 생명과 안전에 중대한 위험이 있는 경우까지 모든 대리결정을 배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결정권과 보호를 어떻게 조화할 것인지가 향후 제도 설계의 핵심 과제로 남는다.

 

새 제도 시행된 것 아니다…지금은 ‘현장 실천’과 ‘제도 개선’ 단계

 

이번 논의를 새로운 지원의사결정 제도가 이미 시행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현행 성년후견제도는 그대로 운영되고 있으며, 인권위 토론회와 자료집은 지원의사결정 체계로의 전환 방향을 논의한 것이다.

 

인권위는 7월 3일 열린 장애인 인권 증진 토론회에서 성년후견제도의 한계를 진단하고 지원의사결정 체계 전환을 위한 실질적인 권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올해 5월 제정된 「장애인권리보장법」은 2028년 5월 27일 시행 예정으로,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에 머물게 하기보다 권리의 주체로 바라보는 정책 흐름도 한층 분명해졌다.

 

제도가 바뀌기를 기다려야만 시작할 수 있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은 결정을 대신하기 전에 당사자의 뜻을 확인하고, 복지기관은 이해하기 쉬운 정보와 의사소통 방법을 마련하며, 후견인은 필요한 범위를 넘어 결정을 대신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볼 수 있다. 의료진 역시 표현의 어려움과 의사 자체가 없다는 판단을 구분해야 한다.

 

앞으로 확인해야 할 것은 인권위가 예고한 권고가 어떤 내용으로 구체화되는지, 정부와 국회가 이를 성년후견 및 공공후견 제도에 어떻게 반영할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현장에서 던질 질문은 분명하다. “내가 보기에 좋은 선택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이 원하는 선택은 무엇이며, 그것을 결정할 수 있도록 우리는 무엇을 지원했는가”이다.
 

작성 2026.08.27 14:21 수정 2026.08.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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