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단대출은 풀고 주담대는 조인다 은행권 가계대출 관리 ‘새 문법’
5대 은행, 가계대출 연간 목표치 이미 1조8천억원 초과
주요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영업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일반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의 문턱은 계속 높이는 반면, 대규모 아파트 입주와 맞물린 집단대출에는 한도를 대폭 늘리고 금리까지 낮추고 있다. 가계대출 총량은 관리하되 주택 공급과 직결된 실수요 자금에는 숨통을 틔우겠다는 금융당국의 정책 변화에 은행권이 발 빠르게 대응하는 모습이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하나은행은 지난 21일 대출모집인을 통한 신규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대출 접수를 11월 실행분에 한해 중단하기로 했다.
이미 높아진 가계대출 문턱을 한층 더 끌어올린 것이다. 연말까지 가계대출 총량 관리에 집중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조치로 풀이된다.
하나은행은 이달 들어 잇따라 대출 규제를 강화했다. 지난 7일 비대면 주택담보대출 신규 가입을 중단한 데 이어 11일에는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최대 5천만원으로 제한했다. 12일에는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의 신규 취급까지 중단했다.
다른 시중은행의 움직임도 크게 다르지 않다.
KB국민은행은 지난달 10일 주택 구입 목적의 담보대출 한도를 지역에 관계없이 3억원으로 축소하는 강도 높은 조치를 내놓은 뒤 이를 유지하고 있다.
신한은행도 이달 5일부터 신규 신용대출 한도를 연 소득 범위에서 최대 1억원으로 낮췄다. 마이너스통장 한도 역시 5천만원으로 축소했다.
NH농협은행은 다소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달 20일부터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 상품 취급을 이례적으로 재개했다. 그러나 다른 은행들은 비슷한 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다.
한 은행이 먼저 대출 문턱을 낮췄다가 대출 수요가 한꺼번에 몰릴 가능성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융권 전체가 대출을 강하게 조인 상태에서 일부 은행만 규제를 풀 경우 수요가 그쪽으로 확 몰릴 수 있어 서로 신중한 분위기”라고 전했다.
은행들이 가계대출 관리의 고삐를 쉽게 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출 총량이다. 주요 은행의 가계대출 증가액이 이미 당초 설정했던 연간 관리 목표치를 넘어섰다.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은행(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의 지난 20일 기준 가계대출 잔액은 정책성 대출을 제외하고 651조1천510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말 644조9천700억원과 비교하면 6조1천810억원 증가했다.
문제는 증가 속도다. 이들 은행이 올해 초 금융당국과 협의해 설정한 기존 연간 가계대출 증가액 목표는 4조3천363억원이었다.
현재 증가액은 이 목표보다 1조8천447억원 많다. 연말까지 상당한 기간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기존 목표선을 이미 넘어선 것이다.
금융당국은 연간 가계대출 총량 증가율 목표를 기존 1.5%에서 3.0%로 두 배 확대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은행들이 일반 가계대출을 곧바로 확대하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추가로 확보되는 대출 여력의 상당 부분이 집단대출 등 주택 공급과 관련된 자금에 투입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은행권으로서는 일반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에 대한 경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다.
강도 높은 자체 규제가 이어지면서 대출 실행의 선행 지표로 볼 수 있는 신청 승인 규모에서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5대 은행이 이달 들어 20일까지 승인한 주택담보대출은 총 5조7천608억원으로 집계됐다. 서류 접수 이후 심사가 완료된 대출을 기준으로 한 수치다.
하루 평균 승인액은 약 2천880억원이다. 지난달 하루 평균 3천259억원과 비교하면 11.6% 감소했다.
신용대출도 증가세가 일단 멈췄다.
5대 은행의 신용대출 잔액은 지난 20일 기준 109조7천462억원으로 전월 말 109조7천533억원보다 71억원 감소했다.
최근 이른바 ‘빚투’, 즉 빚을 내 투자하려는 수요가 늘면서 마이너스통장을 중심으로 신용대출이 빠르게 증가했지만 이번에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신용대출 잔액이 전월 대비 감소한 것은 지난 4월 3천182억원 감소한 이후 넉 달 만이다.
일반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에서는 은행들이 좀처럼 빗장을 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집단대출 시장의 풍경은 정반대다.
은행들은 대규모 입주 단지를 중심으로 집단대출 영업을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특히 다음 달 입주를 앞둔 서울 서초구 대단지 아파트 ‘디에이치 방배’가 은행권 잔금대출 경쟁의 격전지로 떠올랐다.
5대 은행은 기존 각각 1천억원 수준이던 이 아파트의 잔금대출 한도를 지난 20일 일제히 2천억~4천억원 수준으로 확대했다.
은행별 한도를 보면 KB국민은행 3천억원, 신한은행 4천억원, 하나은행 3천500억원, 우리은행 2천억원, NH농협은행 3천억원이다.
숫자로 보면 은행들의 전략 변화가 더욱 선명하다.
5대 은행을 합쳐 5천억원에 불과했던 디에이치 방배 잔금대출 한도가 불과 하루 만에 1조5천500억원으로 늘었다. 세 배가 넘는 규모다.
한도만 늘린 것도 아니다. 더 많은 대출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금리 경쟁까지 시작됐다.
특히 하나은행의 움직임이 눈에 띈다.
하나은행은 일반 대출모집인을 통한 11월 실행분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대출 접수는 중단했지만 디에이치 방배 잔금대출에서는 적극적인 영업에 나섰다.
5대 은행 가운데 가장 낮은 최저 연 4.566%의 금리를 제시하며 고객 확보에 나선 것이다.
다른 은행들도 가산금리를 잇달아 낮추고 있다. 하나은행과 큰 차이가 없는 연 4.68% 수준의 대출 금리를 제시했으며 추가적인 금리 인하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가계대출을 무조건 억제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대출의 성격에 따라 문을 닫거나 여는 ‘선택적 관리’가 본격화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에는 높은 문턱을 유지하면서 주택 공급 과정에서 발생하는 집단대출에는 한도를 확대하는 방식이다. 금융당국의 총량 관리와 주택 실수요자의 자금 수요를 동시에 맞춰야 하는 은행권의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은행권의 시선은 이제 금융당국이 제시할 새로운 가계대출 총량 목표에 쏠리고 있다. 새 목표가 어느 수준에서 정해지느냐에 따라 일반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규제의 강도는 물론 집단대출 경쟁에도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당국에서 1~2주 내로 새로운 총량 목표치를 받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그에 맞춰 새로운 관리 기조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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