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이 산업정책의 영역을 넘어 국제정치와 외교의 새로운 경계선으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의 동맹이 군사기지와 무기체계, 자유무역협정으로 구분됐다면 앞으로는 어떤 반도체와 클라우드를 사용하고, 어느 나라의 AI 모델과 데이터 규칙을 받아들이느냐가 국가 간 협력의 범위를 결정할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은 AI와 반도체, 핵심광물 공급망을 신뢰할 수 있는 국가끼리 구축한다는 ‘팍스 실리카(Pax Silica)’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가 주도하는 이 협력체에는 한국과 일본, 호주를 비롯해 유럽과 중남미·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미국은 AI 공급망을 원료 채굴부터 반도체 제조, 데이터센터, 모델 개발과 응용 서비스까지 하나의 안보 체계로 보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협력국에 중국 주도의 AI 체계와 동시에 손잡지 말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제기됐다는 점이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팍스 실리카 참여국이 중국의 경쟁적 AI 협력기구에도 참여할 경우 미국 주도 협력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취지의 입장을 전달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일본·호주뿐 아니라 중국과 경제관계가 깊은 여러 국가가 선택 압력에 직면할 수 있다.
중국은 이에 맞서 ‘디지털 주권’을 강조했다. 중국 외교부 린젠 대변인은 8월 19일 각국이 자국의 조건과 발전 수요에 따라 협력 대상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며, AI 분야에서 진영을 만들고 다른 국가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방식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표면적으로는 개방과 선택권을 강조하지만 중국 역시 독자적인 AI 생태계를 확대하고 있다. 중국산 반도체와 클라우드, 오픈웨이트 AI 모델, 스마트시티 시스템을 연계해 개발도상국 시장에 공급하고, 국제기구를 통해 자국의 AI 거버넌스 원칙을 확산하려 한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술동맹을 구축하는 셈이다.
AI 외교가 과거의 통신장비 갈등보다 복잡한 이유는 기술의 각 층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AI 서비스 하나를 운영하려면 그래픽처리장치와 메모리반도체, 데이터센터 전력, 클라우드, 학습데이터, 알고리즘, 보안체계가 필요하다. 이 가운데 한 부분이라도 특정 국가의 수출통제나 제재 대상이 되면 전체 서비스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데이터도 핵심 자원으로 부상했다. 중국은 제조업·로봇·교통·상거래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현실 데이터를 국가적 자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특히 로봇이 실제 환경에서 움직이는 ‘체화지능’ 분야에서는 생산현장과 물류망에서 축적한 데이터가 모델 성능을 결정한다. 미국도 중국의 데이터 축적 능력이 AI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국가 데이터전략을 강화하려 한다.
한국은 이 경쟁의 중심에 있다. 한국은 첨단 메모리반도체와 제조업 데이터, 통신 인프라를 갖춘 동시에 미국의 안보동맹국이며 중국과 긴밀한 무역관계를 유지한다. 미국 중심 공급망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의 역할은 크지만, 중국 역시 생산기지이자 중요한 시장이다.
따라서 ‘미국이냐 중국이냐’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한국의 선택을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군사·공공행정·의료처럼 민감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분야에서는 동맹과 보안 검증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 반면 교육·번역·문화콘텐츠·일반 제조처럼 위험 수준이 다른 분야에서는 모델의 출신 국가만으로 일률적으로 차단하기보다 데이터 저장 위치와 접근권한, 모델 투명성, 보안성을 기준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마련해야 할 것은 국가 이름을 적은 허용 목록이 아니라 기술별 위험관리 원칙이다. 반도체·클라우드·모델·데이터를 층별로 나누고, 어느 부분에 해외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 핵심 공공데이터의 국외 이전 제한, AI 학습데이터의 출처 공개, 외국 모델의 보안점검, 서비스 중단 시 대체체계도 마련해야 한다.
국산 AI를 육성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기술을 국내에서 독자 개발하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초거대 모델과 첨단 반도체, 클라우드 기반시설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한국은 모든 것을 혼자 만드는 ‘기술 자급’보다 핵심 기술은 확보하되 여러 공급자를 연결할 수 있는 ‘상호운용성’을 외교 자산으로 활용해야 한다.
한중 AI 협력도 이러한 원칙 아래 재설계할 수 있다. 중국어 특화 언어모델, 제조공정 최적화, 고령층 돌봄, 기후·환경 데이터 분석 등 비군사적 분야에서는 공동연구가 가능하다. 다만 개인정보 보호, 데이터 국외 이전, 지식재산권, 모델 검증 절차를 협력 이전에 합의해야 한다.
AI 진영이 완전히 분리되면 한국 기업은 같은 제품과 서비스를 미국권과 중국권 규격에 맞춰 이중으로 개발해야 한다. 비용은 늘고 시장은 나뉘며 연구자 교류도 위축될 수 있다. 반대로 아무런 기준 없이 양쪽 기술을 혼합하면 보안과 공급망 위험이 커진다. 개방과 안전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AI 시대의 디지털 주권은 외국 기술을 모두 차단하는 능력이 아니다. 필요한 기술을 선택하고, 위험을 검증하며, 특정 국가나 기업이 공급을 중단해도 대체할 수 있는 능력에 가깝다. 한국 외교도 AI를 단순한 수출산업으로 보지 말고 안보·통상·데이터·인권을 연결한 종합 의제로 다뤄야 한다.
미·중 경쟁이 AI의 국경을 만들고 있지만 한국이 그어진 선을 수동적으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 명확한 보안 원칙과 기술 경쟁력, 다층적 협력망을 갖춘다면 한국은 선택을 강요받는 국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AI 생태계를 연결하고 규칙을 제안하는 국가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