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미국과 고위급 외교 채널을 가동해 양국 관계의 안정화를 모색하는 한편, 미국의 첨단기술 규제에는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양국이 대화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인공지능(AI)과 로봇, 에너지 설비 등 차세대 전략산업에서는 경쟁과 견제를 계속하는 모습이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마자오쉬 중국 외교부 상무부부장은 지난 7월 22일부터 23일까지 미국을 방문해 크리스토퍼 랜도 미국 국무부 부장관과 협의했다.
마 부부장은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아시아 담당 고위 관계자와 미국 국방부 정책 담당 차관을 만나고 상·하원 의원들과도 의견을 교환했다.
양측은 중·미 정상 간 합의 이행과 양국의 ‘건설적인 전략적 안정 관계’ 구축 방안을 논의했다. 중국 외교부는 구체적인 의제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외교·안보와 경제·기술 분야를 포함한 주요 현안이 폭넓게 다뤄진 것으로 보인다.
AI 정부 간 대화 추진 가능성
이번 협의에서 특히 주목받은 분야는 인공지능이다. 중국 외교부는 AI를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직면한 중대한 시대적 과제로 규정하고 미국과 양국 정상의 합의를 이행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24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중·미 정상이 향후 회담에서 AI 문제를 논의할 가능성에 관한 질문을 받고 “정상 외교는 중·미 관계에 대체할 수 없는 전략적 지도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마 부부장의 방미 과정에서 양국 간 AI 정부 대화기구의 구성과 운영 방안이 논의됐다는 보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중국 측이 미국과 AI 분야의 정상 간 합의를 이행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면서 정부 간 대화가 추진될 가능성을 열어뒀다.
AI 기술의 안전성과 국제규범, 군사적 이용, 데이터 관리, 첨단 반도체 수출통제 등이 향후 대화의 주요 의제가 될 수 있다. 양국이 기술 경쟁을 계속하더라도 우발적인 충돌과 과도한 규제 확대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협의체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로봇과 전력 인버터 규제
대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기술규제를 둘러싼 갈등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지난 28일 외국에서 생산된 첨단 로봇 장비와 통신 기능이 포함된 전력 인버터를 규제 대상인 ‘커버드 리스트’에 추가했다. 대상에는 휴머노이드 로봇과 네발 보행 로봇을 포함한 이동형 로봇이 포함된다.
관련 제품의 새로운 모델은 원칙적으로 FCC 인증을 받을 수 없어 미국 시장에서 판매하기 어렵게 된다. 이미 인증받은 제품에는 제한이 바로 적용되지 않지만, 향후 규제가 기존 제품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력 인버터는 태양광 패널이나 배터리에서 생산된 전력을 전력망에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핵심 장비다. 통신 기능이 결합된 인버터는 원격으로 상태를 점검하고 제어할 수 있어 태양광 발전소와 에너지저장장치, 데이터센터 등에 폭넓게 사용된다.
미국은 외국산 네트워크 연결 장비가 감시나 정보 수집, 원격조종, 전력망 교란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을 규제 근거로 들었다. 특정 국가를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세계 로봇과 태양광 인버터 시장에서 중국 기업의 비중이 높다는 점에서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한 시장 왜곡”
중국 상무부는 30일 미국의 조치가 형식적으로는 모든 외국산 제품을 대상으로 하지만 실질적으로 중국 기업과 제품을 차별하고 압박하는 정책이라고 반발했다.
상무부 대변인은 로봇과 전력 인버터는 정상적으로 거래되는 국제상품이며 미국 기업과 소비자도 관련 무역의 혜택을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국가안보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대해 정상적인 기업 거래와 공급망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미국 측에 관련 조치를 즉시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이 제한을 계속할 경우 중국도 정당한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대응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다만 구체적인 반격 수단은 밝히지 않았다.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대응 수단으로는 미국 기업과 제품에 대한 조사, 핵심 소재의 수출관리, 불신기업 명단 적용, 미국산 제품에 대한 인증·통관 강화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실제 보복에 나설 경우 최근 복원된 양국 대화 분위기가 다시 악화할 수 있어 중국도 대응 수위를 조절할 것으로 예상된다.
규제 대상, 반도체에서 로봇·에너지로 확대
미·중 기술 경쟁은 그동안 첨단 반도체와 AI 연산장비를 중심으로 진행돼 왔다. 최근에는 로봇과 태양광 인버터, 드론, 배터리, 전력망 장비까지 규제 대상이 넓어지고 있다.
이들 제품은 단순한 제조상품이 아니라 AI와 데이터, 통신망, 국가 기간시설이 결합된 장비라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은 이러한 제품의 공급망을 특정 국가에 의존할 경우 국가안보와 경제안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조치가 안보보다는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기술 장벽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미국이 중국산 제품을 시장에서 배제함으로써 자국 로봇과 에너지 기업에 성장 시간을 제공하려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중국은 완성품 생산뿐 아니라 부품과 소재, 생산설비, 공급망까지 갖추고 있어 가격과 양산 능력에서 강점을 보인다. 미국의 규제가 중국 기업의 미국시장 진입을 제한할 수는 있지만 중국의 내수시장과 아시아·중동·유럽 등 제3국 진출까지 막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협력과 경쟁’ 병행하는 중·미 관계
최근의 흐름은 중·미 관계가 전면적인 화해나 단절 중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보다 대화와 경쟁을 동시에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미국과 정상·외교 당국 간 소통을 유지하고 AI를 포함한 국제 현안을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자국 기업과 전략산업에 대한 규제에는 즉각 반발하며 필요하면 상응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 역시 중국과의 외교 채널을 유지하면서 첨단기술과 에너지 인프라에서는 공급망 분리를 추진하고 있다. 양국 모두 관계가 통제 불가능한 충돌로 확대되는 것은 피하려 하지만 핵심 기술의 주도권을 양보할 가능성도 크지 않다.
향후 중·미 관계는 정상 간 회담과 AI 정부 대화의 성사 여부, 미국의 로봇·인버터 규제 범위, 중국의 대응 수위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양국이 경쟁을 관리할 최소한의 규칙을 마련할 수 있을지, 기술규제가 새로운 보복의 악순환으로 이어질지가 주요 관전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