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131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궁에서 벌어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분노를 넘어 기록, 책임, 주권의 감각으로 다시 읽어야 할 역사

명성황후 시해와 을미의병, 한국 근대사가 남긴 질문

10월 8일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날이다. 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벌어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한 왕비의 죽음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외세가 조선의 궁궐과 주권을 침범한 사건이었고, 이후 을미의병으로 이어진 근대사의 큰 상처였다.

명성황후의 시해장소인 경복궁의 건청궁내 곤녕합의 옥호루 (사진=국가유산청 제공)

10월 8일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날이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음력으로는 8월 20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 일대에서 벌어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사건을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 살해사건”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조선왕후는 오늘날 명성황후로 부르는 고종의 왕후를 말한다.

 

'명성황후'는 사건 당시 조선은 대한제국 선포 전이었다. 1897년 ,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선포 직후 ‘명성’이라는 시호가 부여되고 황후로 추존되었다. 따라서 기사에서는 ‘명성황후’라는 검색·통용 명칭을 쓰되, 첫 문단에서 ‘당시 고종의 왕후’였음을 밝힌다.

 

을미사변은 갑자기 벌어진 궁궐 난입 사건이 아니었다. 배경에는 청일전쟁 이후 달라진 동아시아 정세가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해야 했다. 이 뒤 조선 궁정에서는 러시아를 일본 견제 세력으로 보는 흐름이 강해졌다. 우리역사넷은 이 상황에서 일본이 군인 출신 미우라 고로를 주한 일본 공사로 부임시켰다고 설명한다. 

을미사변 AI생성이미지

사료는 사건의 계획성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는 『대한계년사』 권2, 고종 32년 을미조를 바탕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소개한다. 이 사료는 미우라 고로가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 오카모토 류노스케 등과 움직였고, 훈련대 해산 통보를 받은 뒤 거사를 미루기 어렵다고 판단해 실행에 들어갔다고 전한다. 사료에는 미우라가 “20년간 지속되어 온 조선의 화근”을 제거하겠다는 취지로 왕후 시해를 교사했다는 대목도 실려 있다. 

 

사건 당일의 전개도 사료에 남아 있다. 『대한계년사』는 일본 병사가 동이 틀 무렵 광화문으로 들어와 건청궁으로 향했고, 길을 막던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살해됐다고 적었다. 이어 일본 장교가 병사들에게 문을 둘러싸게 하고, 자객 20~30명이 전각으로 들어가 왕후를 찾았다고 서술한다. 이 기록은 을미사변이 몇몇 낭인의 우발적 폭력이 아니라 일본 공사관, 일본군 수비대, 낭인, 조선 내부 병력이 얽힌 조직적 침입이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현장도 분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해설은 일본 낭인들이 건청궁으로 난입해 왕비의 침전인 곤녕합 옥호루를 침범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왕후를 살해한 뒤 시신을 녹원으로 옮겼고, 훼손했다고 전한다. 이 대목은 자극적으로 소비할 장면이 아니다. 오히려 한 나라의 법궁과 왕실 공간이 외국 세력의 폭력 앞에 무력화된 장면으로 읽어야 한다. 

 

을미사변을 ‘일본 낭인의 범행’으로만 설명하면 책임 구조가 축소된다. 당시 서울 현지에서 사건을 지휘한 일본 측 최고위 인물이 미우라 고로였고, 주요 무력은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였으며, 일본공사관원·영사경찰·신문기자·낭인배 등이 행동대로 동원되었다. 다만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사료와 연구에서 논의가 이어져 왔으므로, 확인된 지휘·동원 구조와 해석이 갈리는 부분을 구분해 써야 한다. 

 

사건 뒤에는 은폐와 책임 회피가 이어졌다. 미우라 측은 사건을 훈련대 해산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행동처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당시 왕궁에 있던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과 미국인 군사교관 다이의 증언으로 사건의 진상이 알려졌다. 그럼에도 일본 측 관련자 처벌은 형식에 그쳤다. 우리역사넷은 미우라 등 사건 관련자 48명이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면소돼 석방됐다고 설명한다. 

 

이 지점에서 을미사변은 단순한 과거의 비극을 넘어선다. 피해자는 분명했지만 책임자는 사라졌다. 사건은 궁궐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명성황후 시해와 왕후폐위조칙은 유생과 백성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여기에 단발령까지 더해지면서 을미의병이 확산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을미의병을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을미사변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먼저 분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분노는 기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분노만 남으면 역사는 쉽게 소비된다. 필요한 것은 사건의 날짜와 장소, 가해 주체와 책임 회피의 구조를 정확히 말하는 일이다. 을미사변을 기억한다는 것은 일본의 폭력을 말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조선의 외교·군사·제도적 취약성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돌아보는 일이다.

 

주권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외교의 균형이 흔들리고, 군사적 방어력이 약해지고, 국정의 중심이 외세의 압력에 노출될 때 균열은 이미 시작된다. 을미사변은 그 균열이 궁궐 안에서 폭력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경복궁의 담장이 무너진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국가의 판단과 방어 체계가 먼저 흔들렸다는 사실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훼손하였다는  녹산 (사진=국가유산청  제공)

기록의 의미도 다시 봐야 한다. 『대한계년사』, 외국인 목격자의 증언, 히로시마 재판 관련 기록은 사건을 지우려 한 힘과 그에 맞서 남겨진 기록의 힘을 함께 보여 준다. 기록은 과거를 보관하는 종이가 아니다. 권력이 감추려 한 사실을 다시 꺼내고, 피해자의 자리를 역사 속에 남기는 장치다. 그래서 을미사변은 역사 교육과 국가유산 보존의 문제가 함께 걸린 사건이다.

 

경복궁 건청궁과 옥호루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그곳은 아름다운 궁궐 건축만 보여 주는 공간이 아니다. 조선 말 외세 침탈과 주권 위기의 기억이 남은 장소다. 국가유산은 빛나는 문화만 담지 않는다. 상처와 치욕의 현장도 국가유산의 일부다. 궁궐을 찾을 때 건물의 형태와 단청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왜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함께 물어야 한다.

 

을미사변을 오늘 말하는 것은 반일 감정을 되풀이하자는 뜻이 아니다.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분명히 말하되, 혐오로 끝내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동시에 우리 내부의 제도, 외교, 안보, 기록 관리가 얼마나 튼튼해야 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과거의 피해를 기억한다는 것은 슬픔을 보존하는 일이 아니다. 같은 방식으로 다시 흔들리지 않을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10월 8일의 의미는 그래서 현재형이다. 을미사변은 1895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질문은 오늘도 남아 있다. 국가는 무엇으로 지켜지는가. 폭력의 책임은 어떻게 기록되는가. 국가유산은 어떤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을미사변은 단순한 추모일이 아니다. 주권과 기록, 책임을 다시 확인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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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10.08 16:00 수정 2026.10.0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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