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하는 사람이 맞는 것은 아니다

 

최보영 칼럼니스트  ⓒ코리안포털뉴스

확신에는 묘한 권위가 있다. 같은 말을 해도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고, 단정적인 문장은 그 자체로 근거를 가진 것처럼 들린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말보다 “분명히 그렇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인다. 누군가 주저 없이 결론을 내리면 우리는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충분한 생각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확신의 크기와 생각의 깊이가 언제나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확신은 지식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생긴다.

 

조금 알 때 오히려 말하기 쉬운 것들이 있다. 사람을 몇 번 겪고 나면 사람 보는 법을 알 것 같고, 몇 번의 성공과 실패를 지나면 인생에도 일정한 법칙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오래 들여다볼수록 간단했던 답을 방해하는 것들이 자꾸 나타난다. 같은 원인이 늘 같은 결과를 만들지 않고, 옳다고 믿었던 판단에도 예외가 생긴다. 아는 것이 늘어날수록 답만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도 많아지는 이유다. 정말 많이 아는 사람이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함부로 지워버릴 수 없는 경우들을 너무 많이 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이 많은 사람보다 답이 많은 사람에게 더 쉽게 마음을 내준다. 불확실한 상태를 오래 견디는 일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을 때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는 말은 정확할 수는 있어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때 누군가 “내가 봐서 아는데, 이건 분명하다”고 말하면 복잡했던 세계가 잠시 정돈된다. 확신하는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그 사람이 옳아서만이 아니다. 그의 확신을 빌리는 동안 내 불안도 잠시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신에는 일종의 거래가 생긴다. 한쪽은 답을 내놓고 다른 한쪽은 판단의 부담을 내려놓는다.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은 영향력을 얻고, 듣는 사람은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을 얻는다. 그러다 보면 근거가 얼마나 충분한지를 묻는 대신 얼마나 자신 있게 말하는지를 보고 판단하게 된다. 특히 자신의 판단을 의심할 줄 아는 사람은 조건을 붙이고 예외를 말하지만, 틀릴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망설임이 없다. 전자는 “현재까지는 그렇다”고 말하고 후자는 “원래 그런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때로는 아는 사람의 신중함이 모르는 사람의 확신에 밀린다.

 

하지만 확신에서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틀린 답이 아니다. 틀린 답은 고치면 된다. 더 위험한 것은 답을 가진 뒤 질문을 멈추는 일이다. “나는 사람을 좀 안다”,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그런 사람은 결국 다 똑같다”는 말은 경험에서 나온 통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은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동시에 세상을 이미 이해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몇 번 맞았던 판단이 어느 순간 새로운 사실을 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례는 그저 예외로 처리된다.

 

그래서 경험이 많다고 저절로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경험이 지혜가 되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내가 겪은 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자각이다. 스무 명을 만나 얻은 사람에 대한 결론도 스물한 번째 사람 앞에서는 틀릴 수 있고, 오랫동안 옳았던 방식도 상황이 달라지면 맞지 않을 수 있다. 경험이 많다는 사실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으로 만든 결론을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렇지 않으면 경험은 지혜가 아니라 고집에 훌륭한 근거만 제공한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보다 더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묻는다. 찾아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판단을 미룰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신이 완성되면 새로운 정보는 배움의 재료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방해하는 것이 되기 쉽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증거를 만났을 때 생각을 고치기보다 그 증거를 예외라고 부르는 데도 능숙하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답만 남는 것이 아니다. 다른 가능성이 들어올 자리도 함께 사라진다.

 

그렇다고 매사에 자신 없어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하고 결정하며 살아야 한다. 어떤 순간에는 과감한 결론도 필요하다. 다만 결론을 내리는 것과 그 결론을 진리로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다. 오늘 내가 가진 정보로 최선을 다해 판단하되, 내일 다른 사실을 알게 되면 생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의견과 자신을 너무 단단히 묶어두면 이것이 어려워진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내가 틀린 사람이다’로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은 사실보다 체면을 지키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무엇을 확신하는가보다 자신의 확신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다른 의견을 들었을 때 바로 반박부터 하는지,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오래 믿어온 생각이라도 틀렸다는 것을 알면 놓을 수 있는지. 많이 아는 것도 지성이지만, 자신이 아는 것의 경계를 아는 것 역시 지성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짧지만 하기 어려운 말이다.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겠다는 뜻도, 상대가 옳다고 인정하는 말도 아니다.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 있을 가능성을 남겨두겠다는 뜻이다. 오히려 자기 생각 하나가 틀렸다고 해서 자신 전체가 무너지지 않는 사람만이 이 말을 편하게 할 수 있다.

 

확신하는 사람이 맞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순간은 확신이 없는 때보다 확신이 너무 완벽해졌을 때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모를 때는 배우려 하지만,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는 질문을 멈추기 때문이다.

 

지성의 반대말은 무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일 수 있다.

 

 

작성 2026.10.08 01:42 수정 2026.10.08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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