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사사기 13장은 삼손의 탄생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본문을 단순히 ‘힘센 영웅 삼손의 탄생 예고’로 읽으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본문의 중심에는 삼손보다 먼저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한 가정을 찾아오셨고,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삶을 준비하셨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을 어떻게 준비시키고 있는가.
사사기 13장은 익숙하면서도 무거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블레셋의 손에 넘기셨다. 그 기간은 무려 40년이었다.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구조가 있다. 이스라엘의 범죄, 하나님의 징계, 백성의 부르짖음, 사사의 등장, 구원이다. 그런데 삼손 이야기의 시작에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본문 1–14절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다.
이것은 의미심장하다.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블레셋의 지배를 받다 보면 압제조차 일상이 될 수 있다. 처음에는 견딜 수 없었던 현실도 오래 지속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문제를 문제라고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상태가 오래되면 멀어져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기도가 사라지고 말씀이 마음을 흔들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다. 세상의 가치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백성이 먼저 부르짖기를 기다리기만 하지 않으셨다. 아무도 구원을 요청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때, 하나님께서 먼저 구원을 준비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신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왕궁이나 군대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소라 땅에 사는 단 지파 사람 마노아의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불가능’이라고 써 붙인 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우리 역시 현재의 조건만 보고 미래를 판단한다. 나이가 많아서, 능력이 부족해서, 가진 것이 없어서,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가능성과 하나님의 가능성을 동일하게 놓지 않는다.
특히 주목해야 할 표현은 삼손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시작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삼손 한 사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역사의 완성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에게 맡겨진 것은 시작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순종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한 사람을 돌보고, 한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고,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불의 앞에서 작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긴 역사에서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여호와의 사자는 태어날 아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명한다. 어머니에게도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순서를 발견한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먼저 “무엇을 이루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먼저 “누구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정하셨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성취와 연결한다. 무엇을 했는가, 얼마나 성공했는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보다 정체성을 먼저 말씀하신다.
삼손의 긴 머리 자체가 능력의 원천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이라는 표지였다. 문제는 훗날 삼손이 그 표지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별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오늘의 신앙에도 같은 위험이 있다. 직분은 있는데 거룩이 없고, 성경 지식은 있는데 순종이 없으며, 종교적 언어는 풍성하지만 삶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흔적이 희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강한 사람’이기 전에 구별된 사람이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사람은 마노아다. 그는 아들이 태어난다는 소식을 들은 뒤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의 사람을 다시 보내셔서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하나님의 사자는 다시 나타났다.
마노아는 먼저 아이의 성공을 묻지 않았다.
“이 아이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 됩니까?”
“어떤 능력을 갖게 됩니까?”
“어떻게 하면 출세할 수 있습니까?”
그의 질문은 달랐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합니까?
우리 시대 부모와 교육자, 교회 공동체가 다시 붙들어야 할 질문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좋은 학교, 좋은 직업,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많은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성공한 사람이기 전에 선한 사람,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기 전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볼 줄 아는 사람,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기 전에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 세상의 목소리보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으로 키우고 있는가.
흥미롭게도 하나님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새로운 비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그의 아내에게 말씀하신 것을 다시 확인한다. 포도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부정한 것을 먹지 말고 명령한 것을 지키라고 한다.
아이를 준비시키기 전에 부모의 삶부터 준비하라는 말씀처럼 들린다.
신앙교육은 말보다 삶에서 시작된다. 아이에게 기도하라고 말하기 전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정직하라고 가르치기 전에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사랑을 가르치려면 가정 안에서 사랑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
삼손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부모를 준비시키고 계셨다.
오늘 우리는 자녀와 다음 세대가 달라지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달라지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
사사기 13장의 희망은 삼손의 힘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백성이 부르짖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일하셨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가정을 찾아오셨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한 아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이 막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까지 멈춘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준비하신다. 그리고 때로 그 준비는 우리가 기대하는 영웅을 찾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