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한식 디렉터 장윤정]이 전하는 세계 요리의 유래 우크라이나 보르시, 붉은 수프 한 그릇에 땅과 가족의 역사를 끓이다

비트가 처음부터 주인공은 아니었다, 이름에 남아 있는 오래된 수프의 흔적

농부들의 일상식에서 세대를 잇는 가족의 음식으로 발전하다

2022년 유네스코가 보호 필요성을 인정한 우크라이나의 살아 있는 음식문화

사진 미식 1947 보르시 이미지

 

 

이번 세계 요리 여행은 동유럽의 Ukraine으로 향한다. 오늘의 주인공은 강렬한 붉은빛만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보르시(Borshch)다.

 

커다란 냄비 안에는 비트와 양배추, 감자, 당근, 양파 등이 들어가고 지역과 가정에 따라 고기를 넣기도 한다. 완성된 수프 위에는 사워크림을 곁들이고 딜 같은 허브를 올려 먹는다.

 

그런데 보르시의 역사를 살펴보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초기의 보르시는 지금처럼 비트로 만든 붉은 수프가 아니었다.

 

'보르시'라는 이름은 흔히 동유럽에서 자라던 식물인 호그위드(hogweed)와 관련된 옛 슬라브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설명된다. 과거 사람들은 이 식물의 어린잎과 줄기를 발효시키거나 국물 요리에 이용했다.

즉 오늘날 보르시의 상징이 된 비트는 처음부터 주인공이 아니었던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식재료와 농업환경이 변했고, 비트가 수프에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보르시는 지금의 붉은 모습을 갖춰갔다. 비트가 국물에 선명한 색과 은은한 단맛, 흙내음을 더하면서 현재 우리가 떠올리는 보르시가 발전했다.

 

하지만 보르시를 단순히 '비트 수프'라고 부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우크라이나에는 지역과 계절, 집안마다 수많은 보르시 조리법이 존재한다. 어떤 집에서는 돼지고기 육수를 사용하고 다른 집에서는 콩을 넣는다. 버섯이나 생선을 활용하는 지역도 있고, 여름에는 차갑게 만들어 먹기도 한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에서는 종종 “집집마다 자기만의 보르시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음식이 널리 사랑받은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비트와 양배추, 감자, 당근 같은 채소는 비교적 저장하기 좋았다. 추운 겨울이 긴 지역에서 저장채소를 이용해 커다란 냄비에 수프를 끓이면 가족 여러 명이 든든하게 먹을 수 있었다.

 

보르시는 한 번 끓여 바로 먹는 것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맛이 어우러지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넉넉하게 끓여 두고 며칠에 걸쳐 먹는 가정도 많았다.

 

 

사진 미식 1947 보르시 요리하는 이미지

 

 

흥미로운 점은 같은 이름 아래 서로 다른 맛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동유럽 여러 지역에도 보르시와 관련된 수프 문화가 있다. 국경과 민족의 역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만큼 보르시의 역사 역시 하나의 직선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보르시는 특별히 강한 문화적 의미를 갖는다.

가족의 조리법이 부모에서 자녀에게 전해지고 명절과 결혼식, 장례식과 공동체 행사 등 삶의 여러 순간에 등장한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수프가 아니라 가족의 기억을 전달하는 음식인 것이다.

 

2022년에는 UNESCO가 '우크라이나 보르시 조리 문화(Culture of Ukrainian borscht cooking)'를 긴급보호가 필요한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네스코가 특정 레시피 한 가지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정과 공동체에서 보르시를 만들고 함께 먹으며 조리법과 지식을 다음 세대로 전하는 문화 자체를 보호 대상으로 본 것이다.

 

보르시를 먹을 때 빠지지 않는 즐거움도 있다.

뜨거운 붉은 국물 위에 새하얀 사워크림 한 숟가락을 올린다. 숟가락을 움직이면 흰 크림이 붉은 국물 사이로 천천히 번지면서 부드러운 분홍빛을 만든다.

 

여기에 마늘 향이 나는 빵 팜푸시키(Pampushky)를 곁들이기도 한다.

새콤하면서도 은근히 달콤한 비트의 맛, 채소의 깊은 감칠맛 그리고 사워크림의 부드러움이 만나 투박하지만 따뜻한 한 끼가 완성된다.

 

왕실의 요리사가 발명한 음식도 아니고 어느 유명 식당에서 처음 판매한 음식도 아니다.

땅에서 수확한 채소를 오래 보관하고 가족을 먹이기 위해 끓였던 평범한 수프가 수백 년의 시간을 지나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음식이 됐다.

 

보르시의 진짜 맛은 비트의 붉은색에만 있지 않다. 할머니의 냄비에서 어머니의 냄비로, 다시 다음 세대의 식탁으로 이어져 온 수많은 조리법과 가족의 기억이 함께 끓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보르시 한 그릇은 먹는 음식이면서 동시에 세대를 이어가는 하나의 이야기다.

 

 

 

작성 2026.09.24 22:24 수정 2026.09.24 22:24

RSS피드 기사제공처 : 미식1947 / 등록기자: 장윤정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해당기사의 문의는 기사제공처에게 문의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