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은 교수의 요리에세이 『오늘도 핑크 한스픈』 18화. 나이가 아니라 손이 기억했다

다시 학생이 되어 보니 늦게 시작한 시간이 오히려 오래된 생활요리의 힘이 되어주었다

머리로는 처음 배우는 기술도 수없이 밥상을 차려온 손끝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늦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살아온 경험까지 나의 실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경은이의 성장 이야기

 

 

 


18화. 나이가 아니라 손이 기억했다

 

다시 요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걱정은 역시 나이였다.
‘내가 너무 늦게 시작한 건 아닐까.’
젊은 학생들 사이에 앉아 있으면 그런 생각이 슬쩍 고개를 들 때가 있었다.


설명을 한 번 듣고 빠르게 따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손이 가볍고 움직임이 빠른 사람도 있었다.
나는 괜히 내 손을 내려다봤다.


예전보다 새로운 것을 익히는 속도가 느린 것 같기도 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많았고,
새로운 용어도 있었다.


조리 순서 하나를 머릿속으로 몇 번씩 다시 생각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마음 한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막상 조리대 앞에 서면 이상한 일이 생겼다.


머리는 잠시 멈칫해도 손은 움직였다.
칼을 잡으면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찾았고,
채소를 씻고 다듬는 순서도 몸이 먼저 알았다.


팬을 들면 대략적인 무게가 느껴졌고,
국물을 맛보면 무엇이 조금 부족한지 어렴풋이 짐작됐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문적인 조리 공부는 처음일지 몰라도,
내 손은 이미 오랜 시간 부엌을 살아온 손이었다.


가족을 위해 밥을 했던 수많은 날들이 있었다.
아이가 잘 먹을 수 있도록 재료를 작게 썰었던 날.
냉장고 속 남은 재료를 보며 저녁 메뉴를 고민했던 날.
시간이 없어서 두세 가지 음식을 동시에 준비했던 날.
간이 맞지 않아 다시 조절했던 날.
다 된 줄 알았는데 속이 덜 익어 다시 불을 켰던 날.


누구도 그것을 경력이라고 불러주지는 않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생활이었다.


하지만 다시 배우는 자리에서 보니 그 생활은 내 손에 꽤 많은 것을 남겨놓고 있었다.
수업 중 여러 가지 재료를 한꺼번에 손질해야 하는 날이 있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급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차츰 익숙한 리듬이 생겼다.
먼저 오래 걸리는 것을 불에 올리고,
그 사이 다른 재료를 손질하고,
냄비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다음 순서를 준비했다.


집에서 매일 저녁을 차릴 때 하던 방식이었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아, 이것도 내가 이미 해왔던 일이구나.’
조리 기술의 이름은 몰랐어도 나는 오래전부터 시간 배분을 하고 있었다.

 


생활요리는 그렇게 나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한 가지 음식을 만드는 동안 다른 냄비를 살피는 것.
재료 하나를 쓰고 남은 것을 어디에 활용할지 생각하는 것.


음식이 완성되는 시간을 맞추는 것.
뜨거운 음식은 따뜻할 때 내고,
차가운 음식은 마지막까지 상태를 유지하는 것.


나는 그 모든 것을 집에서 수없이 반복해왔다.
당시에는 그저 식구들 밥을 제시간에 차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그것도 실력이었다.
칼질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전문적인 기준에 맞춰 다시 배워야 하는 부분은 많았다.
두께와 크기를 정확히 맞추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처음에는 내 마음처럼 되지 않아 속상했다.
하지만 칼 자체가 낯설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주방에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조금씩 자세를 고치고,
힘을 빼고,
배운 방법을 더하자 손이 빠르게 적응했다.


새로운 기술이 완전히 낯선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경험 위에 올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이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늦었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살아온 시간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수없이 반복해온 일이 있었고,
사람을 살핀 경험이 있었고,
실패를 고쳐본 기억도 있었다.
그것들은 시험지에는 적을 수 없는 공부였다.

 

 

 

 

 

 

젊었을 때였다면 빠르게 배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었다.


기다리는 법을 알았다.
한 번 안 된다고 바로 포기하지 않는 법도 알았다.


오늘 안 되면 내일 다시 해보는 것이 인생에서 별일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생활을 해본 사람에게 실패는 조금 덜 무서웠다.


이미 살면서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들을 많이 만나봤기 때문이다.
요리를 하다가 음식이 마음처럼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예전에는 실망이 먼저였을 것이다.
‘왜 나는 안 되지?’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랐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살펴보았다.


불이 너무 셌는지,
수분이 많았는지,
순서를 놓쳤는지,
시간을 잘못 계산했는지.
그리고 다음에는 바꾸면 됐다.


나는 실패를 결과보다 정보로 보기 시작했다.
그것도 살아온 시간이 알려준 태도였다.


손은 참 신기했다.
오랫동안 반복한 것은 생각보다 깊게 남아 있었다.
반죽을 만지면 너무 질거나 되다는 것이 느껴졌고,


채소를 잡으면 대략적인 수분감이 손에 왔다.
고기를 팬에 올렸을 때 나는 소리를 들으면 불의 상태가 짐작됐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사소한 감각일지 몰라도 나는 그런 순간마다 조금씩 자신감을 얻었다.
‘내 손도 많이 배워왔구나.’


나는 내 손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어릴 때 엄마를 보며 가장 신기했던 것도 손이었다.


소금 한 꼬집.
간장 한 바퀴.
손으로 조물조물 무친 나물.


엄마에게
“얼마나 넣어?”
하고 물으면
“적당히.”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적당히가 그렇게 답답했는데,
살아보니 조금 알 것 같았다.


반복된 시간이 손 안에 기준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물론 감각만 믿어서는 안 됐다.


전문적으로 배우면서 나는 정확함의 중요성도 다시 알게 되었다.
몇 그램.
몇 도.
몇 분.
기준이 있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생활에서 얻은 감각 위에 정확한 이론을 올리고 싶었다.
그 두 가지가 만나는 순간이 좋았다.


엄마에게서 보았던 손맛과 교실에서 배우는 정확한 기술.
둘 중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져가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요리였다.
처음에는 나이 때문에 자신감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내가 살아온 시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며 배운 사람을 살피는 마음.


가족 식탁을 차리며 익힌 시간 관리.
냉장고 속 재료를 활용하며 생긴 응용력.
예쁜 그릇과 색을 좋아하며 쌓인 감각.


그 모든 것이 교실 안에서 조금씩 힘을 발휘했다.
생활은 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의 속도를 덜 보게 되었다.
누가 더 빨리 배우는지.
누가 더 예쁘게 만드는지.
누가 더 능숙한지.
처음에는 그런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결국 내가 바라봐야 할 것은 어제의 나였다.
지난번보다 칼질이 조금 안정됐는지.


어제보다 접시가 정돈됐는지.
한 번 틀린 것을 오늘은 고쳤는지.
그렇게 생각하니 공부가 훨씬 편안해졌다.


나는 늦게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 내 시간에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 문장이 마음에 들어왔다.


남의 시간표에 나를 맞추면 언제나 늦어 보였다.
하지만 내 삶을 처음부터 바라보면 지금의 시작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살아야 했던 시간이 있었고,
가족을 돌봐야 했던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 속에서도 나는 계속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시작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오래 이어진 길의 다음 부분이었다.
배움에는 나이와 상관없는 설렘도 있었다.


처음 제대로 된 결과가 나왔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기뻤다.
“됐다.”
혼자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잘 안 되던 것이 어느 날 되었을 때,
어제 이해하지 못했던 설명이 갑자기 이해될 때,
마음이 환해졌다.


그때만큼은 나이가 몇 살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배우는 사람은 누구나 새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묘한 자신감을 얻었다.
무엇이든 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모르면 배울 수 있다는 자신감.
처음에는 안 되어도 연습하면 조금 나아질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게 훨씬 단단했다.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자신감보다 다시 배울 수 있다는 믿음인지도 몰랐다.
어떤 날에는 집으로 돌아와 손을 바라봤다.


설거지와 집안일을 많이 해서 고운 손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칼도 많이 잡았고,
뜨거운 냄비도 들었고,
반죽도 만졌다.


그 손으로 아이에게 밥을 먹였고,
가족의 식탁을 차렸다.


그리고 이제 그 손으로 다시 내 꿈을 배우고 있었다.
갑자기 내 손이 조금 대견하게 느껴졌다.


전에는 살아온 시간을 뒤늦은 출발의 이유로 생각했다.
이제는 달랐다.


살아온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요리가 왜 사람에게 필요한지도 알고,


따뜻한 한 끼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도 알고,
음식을 만든 사람의 수고도 알고 있었다.


기술은 이제 배우고 있었지만 요리의 의미는 이미 삶에서 배우고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금도 나는 손을 유심히 볼 때가 있다.


처음 칼을 잡아 어색한 학생의 손.
긴장해서 힘이 잔뜩 들어간 손.
조금 익숙해지며 움직임이 부드러워지는 손.
그 모습을 보면 그때의 내가 생각난다.


그래서 서두르지 말라고 말해준다.
손은 생각보다 천천히 배우고,
한번 배운 것은 오래 기억하니까.


나는 이제 ‘손맛’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오래 요리한 사람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손맛은 살아온 시간과 배운 기술이 만나는 곳에 생기는 것 같다.


기억하고,
반복하고,
실패하고,
고치고,


누군가에게 먹이면서 쌓인 것.
그것이 손에 남는다.


다시 학생이 된 나는 매일 새로운 것을 배웠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것들도 하나씩 발견했다.


이 과정이 참 중요했다.
새로운 내가 되는 것만이 성장은 아니었다.


내 안에 이미 있던 것을 알아보는 것도 성장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는 긴 생활의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나이가 있어서 안 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오래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만큼 살아봤으니까 이것도 활용해보자.’
그 생각 하나로 마음의 방향이 달라졌다.


부족한 것만 보던 눈이 가진 것을 보기 시작했다.
요리도 삶도 비슷한 것 같다.


냉장고를 열어 없는 재료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있는 것을 살펴보면 한 끼가 시작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게 없는 젊음,
없는 시간,
없는 조건만 바라보면 시작하기 어렵다.


대신 지금 가지고 있는 경험,
감각,
시간,
마음을 살펴보면 할 수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그 사실을 요리하면서 다시 배웠다.
나이가 아니라 손이 기억했다.


그리고 그 손 안에는 단순한 조리 경험만 들어 있지 않았다.
가족을 사랑했던 시간.
아이를 기다렸던 시간.
엄마의 손을 바라보던 기억.
수많은 저녁을 완성했던 생활.


그 모든 것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나는 이제 늦게 시작한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조금 더 빨랐다면 또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내 요리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들어 있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 가질 수 없는 나만의 재료였다.
그리고 나는 그 재료를 가지고 계속 배우면 된다.


앞치마를 단단히 묶고,
칼을 잡고,
다시 한 번 도마 앞에 선다.


오늘 처음 배우는 기술도 언젠가는 내 손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손은 내가 살아온 시간을 알고 있으니까.


경은의 한마디
“나는 늦게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을 가지고 다시 시작한 사람이었다.”


오늘의 핑크 한스푼
오늘 내게 부족한 것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오래 해온 일.
살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감각.
누군가를 돌보며 배운 마음.
수없이 반복하면서 능숙해진 작은 일.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모두 나의 경험입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을 믿어주는 마음을 한스푼 더해보세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그 경험들이 생각보다 든든한 힘이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작성 2026.09.23 23:33 수정 2026.09.24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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