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어나는 기후 변화와 기후 행동에 대한 기독교와 이슬람의 생각

1971년 남침례회 목사 81.7%는 환경 운동에 찬성했다, 그런데 지금은

칼리파와 청지기 사이 — 기독교와 이슬람의 생태 신학, 어디까지 같고 어디서 갈리나

문서는 쌓여가는데 배출량은 왜 줄지 않는가

▲ AI 이미지,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제공

탄자니아의 한 어촌. 어부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물고기를 잡았다. 산호초가 부서지고 어장이 죽었다. 정부가 금지령을 내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무슬림 학자들이 배에 올랐다. 그들은 법이 아니라 꾸란을 펼쳐 보였다. 이런 어업은 신앙에 어긋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어부들이 폭약을 내려놓았다. 한 어부가 남긴 말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 보전은 백인이 가져온 것이 아니라 꾸란에서 온 것이라는 말이었다. 같은 문장을 거꾸로 세우면 기독교 복음주의의 지난 시간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된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었다. 그 과학이 누구의 언어로 도착하느냐였다.

 

먼저 기독교 쪽을 살펴보자. 1967년 역사학자 린 화이트 주니어가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논문 하나를 실었다. 생태 위기의 뿌리가 서구 기독교에 있다는 주장이었다. 창세기의 다스리라는 명령이 자연 착취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논쟁은 뜨거웠다. 그리고 3년 뒤 프랜시스 쉐퍼가 답을 내놓았다. 1970년에 나온 「공해와 인간의 죽음」이다. 쉐퍼는 화이트의 비판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 책의 부록에 화이트의 논문 전문을 실었을 정도다. 다만 결론이 달랐다. 문제는 성경이 아니라 성경을 오독한 기독교라는 것이다. 다스림은 소유가 아니라 청지기직이라고 그는 못 박았다.

 

놀라운 건 그 시절의 온도다. 1971년 미국 남침례회가 실시한 조사에서 목회자의 81.7%, 교회학교 교사의 76.3%가 교회가 대기와 수질 오염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고 답했다. 오늘의 통념과는 정반대다. 반세기 사이에 무엇이 바뀌었나. 신학이 아니다. 정치다. 환경 의제가 특정 정파의 상징이 되면서, 신앙의 언어였던 청지기직이 진영의 구호로 밀려났다. 화이트의 논문이 남긴 진짜 상처도 여기에 있다. 기독교가 범인으로 지목되자 일부 신자들은 사실을 검토하는 대신 방어에 들어갔다.

 

그사이 다른 흐름이 자랐다. 19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는 자연을 훼손하는 일을 죄라고 규정해 녹색 총대주교라는 별명을 얻었다. 참고로, 도시의 현재 행정적·지리적 명칭은 튀르키예 공화국의 이스탄불이지만, 동방정교회의 공식 직함과 교회법적 전통에서는 1,700여 년의 역사적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명칭을 유지한다. 또한, 2010년 로잔 케이프타운 서약은 창조 세계 돌봄을 복음의 문제로 명시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이 논의를 세계의 공적 의제로 올렸고, 2023년 「하느님을 찬미하여라」가 뒤를 이었다. 2026년 9월 1일 카스텔간돌포. 레오 14세 교황은 교황청 정원의 보르고 라우다토 시에서 창조 질서 보호를 위한 미사를 집전했다. 그의 메시지 주제는 이사야 2장 4절,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든다는 구절이었다. 전쟁과 환경 파괴가 서로를 먹이는 악순환을 이룬다는 진단이었다. 그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제 이슬람 쪽을 살펴본다. 뼈대는 4개의 낱말로 요약된다. ‘칼리파’는 대리자 또는 청지기다. 인간은 땅의 주인이 아니라 맡은 자이며, 그 행위에 대해 신 앞에서 책임을 진다. ‘아마나’는 맡겨진 신탁이다. ‘미잔’은 균형이다. 신이 모든 것을 정해진 척도와 한계 안에서 창조했다는 뜻이다. ‘히마’는 예언자 시대부터 내려온 보호 구역 제도로, 방목과 벌목을 제한해 자연을 남겨 두는 관행이었다. 튀르키예 위스퀴다르 대학 철학 교수 이브라힘 외즈데미르는 꾸란에 환경과 관련된 구절이 약 200개에 이른다고 말한다.

 

동물에 관한 가르침도 구체적이다. 무함마드는 놀이를 위한 살생을 금했고, 낙타와 나귀에 짐을 과하게 싣지 말라고 했으며, 식용으로 도축할 때도 대상의 고통을 살피라고 가르쳤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손과 발에 닿는 규범이다.

 

외즈데미르의 논지에서 가장 날카로운 대목은 따로 있다. 무슬림 세계가 환경 의제에 미온적인 이유가 무지 때문만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산업화를 먼저 끝낸 나라들이 이제 와서 배출량을 줄이라고 요구하는 구도, 그가 환경 식민주의라 부르는 그 구도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는 것이다. 이슬람학자 세예드 호세인 나스르의 진단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서구의 탈 신성화가 자연을 관리할 대상이 아니라 지배할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기독교인에게도 뼈아프다.

 

한편, 문서들도 있다. 2015년 이스탄불에서 무슬림 학자들이 기후변화에 관한 이슬람 선언을 발표했다. 외즈데미르는 이 선언이 「찬미받으소서」에서 자극받았다고 밝혔다. 그 흐름은 2024년 2월 27일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6차 유엔환경총회에서 「알미잔: 지구를 위한 언약」으로 결실을 보았다. 12개 언어로 번역된 이 문서는 이슬람 국가와 기업에 화석연료로부터의 신속한 전환을 촉구했고, 생태계 파괴와 종의 절멸을 생태 학살로 규정했다. 발표 현장에서 유엔환경계획 주재 교황청 대표는 이 문서가 「찬미받으소서」의 가르침과 여러 면에서 공명한다고 평했다. 인도네시아는 2014년 멸종위기종 보호를 의무화하는 이슬람의 유권해석인 ‘파트와’를 냈고, 2013년 현지 연구는 설교에 환경 메시지를 넣었을 때 주민의 인식이 실제로 달라졌음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지금 두 종교 모두 같은 병을 앓는다. 교리와 행동 사이의 거리다. 세계 최대 무슬림 인구 국가인 인도네시아는 온실가스 배출 5위권이고,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은 대기 오염이 가장 심한 나라로 꼽힌다. 2050년까지 방글라데시 인구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이 기후로 인해 삶터를 잃을 수 있다는 추정도 있다. 중동의 넓은 지역은 폭염으로 거주가 어려워질 전망이다. 

 

기독교 쪽도 다르지 않다. 교황과 총대주교가 아무리 말해도, 미국 복음주의 신자들의 기후 인식은 주류 개신교나 가톨릭 신자보다 눈에 띄게 낮은 편이다. 복음주의 내부에서도 노선이 갈린다. 한쪽에는 창조 세계 돌봄을 신앙의 의무로 보는 단체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기후 정책이 가난한 이들에게 더 큰 부담을 지운다고 주장하는 단체들이 있다. 후자의 논리도 전부 틀린 것은 아니다. 에너지 가격이 오르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저소득 가구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걱정이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 가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문서는 쌓이는데 배출량은 줄지 않는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두 전통이 같지 않다는 선을 그어야 한다. 이슬람의 칼리파론은 인간을 신의 대리자로 세우고 심판에서의 책임을 강조한다. 기독교의 청지기론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라는 큰 이야기 속에 놓인다. 성경 로마서 8장은 피조물이 신음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말한다. 자연은 회복될 대상이지 관리될 자산이 아니다. 종말론도 다르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폐기될 세계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으며, 얼버무릴 이유도 없다.

 

그러나 차이를 인정하는 일과 협력을 거부하는 일은 별개다. 탄자니아의 어부를 움직인 건 국제 협약이 아니라 그가 믿는 책이었다. 미국 앨라배마의 농부를 움직일 것도 통계가 아니라 창세기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은 자기 언어로 말을 걸어올 때 몸을 돌린다. 그것이 두 신앙의 가장 단순한 진실이다.

 

지난 세월 수많은 회의실에서 우리의 지구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정작 마음을 바꾼 사람은 회의실이 아니라 배 위에, 밭 가운데, 예배당 뒷자리에 있었다.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은 유행하는 의제가 아니라 맡겨진 청지기의 일이다. 만약 맡긴 분이 계신다면, 언젠가 그분은 셈을 물으실 것이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지구를 물려받은 것인가, 아니면 잠시 맡은 것인가.

작성 2026.09.20 23:45 수정 2026.09.20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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