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은 교수의 요리에세이 『오늘도 핑크 한스픈』 16화 나도 다시 시작 할 수 있을까

가족과 생활을 먼저 챙기느라 뒤로 미뤄두었던 자신의 꿈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경은이

너무 늦은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을 넘어 다시 배우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보다 여전히 요리를 좋아하는 마음을 믿고 새로운 첫걸음을 내딛다

 

 

가끔 그런 날이 있었다.

하루 종일 가족을 챙기고, 밥을 하고, 집안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나씩 끝내고 나면 밤이 되어서야 조용한 시간이 찾아왔다.

집 안이 고요해지고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던 손도 잠시 멈추는 시간.

 

그때 문득 생각했다.

‘나는 뭘 하고 싶었지?’

참 이상한 질문이었다.

분명 어릴 때는 좋아하는 것이 많았다.

 

요리하는 것이 좋았고, 예쁜 그릇을 보는 것도 좋았고, 음식을 담고 꾸미는 일도 재미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부엌으로 향했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냉장고 문을 열어봤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보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지?’

를 더 많이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생활은 빠르게 흘렀다.

결혼을 하고,

가족을 돌보고,

아이를 키우고,

매일의 식탁을 책임졌다.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있었다.

그 사이 시간도 꽤 많이 지나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다시 뭔가 시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곧바로 다음 생각이 따라왔다.

‘지금?’

그 두 글자 안에는 많은 두려움이 들어 있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다시 배우기에는 시간이 많이 지나버린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은 이미 앞서가고 있는데 나는 너무 뒤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시작했다가 잘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괜히 욕심만 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싶은 마음보다 망설이는 마음이 먼저 앞섰다.

 

어릴 때는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궁금하면 해봤다.

 

계란말이가 만들고 싶으면 팬을 꺼냈고, 예쁜 음식이 보이면 흉내라도 내봤다.

실패해도 다음에 다시 하면 됐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니 시작에는 자꾸 이유가 필요해졌다.

“왜 하려고 해?”

“지금 시작해서 뭐 하게?”

“시간은 있어?”

“잘할 수 있겠어?”

 

누가 묻지 않아도 내가 나에게 먼저 물었다.

질문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작아졌다.

 

그래도 요리를 보면 마음은 움직였다.

누군가 잘 차려낸 한 접시를 보면 오래 바라봤다.

 

새로운 조리법을 보면 궁금했고,

요리책을 펼치면 몇 장만 보려다가 한참을 읽었다.

 

배울 만한 수업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올라왔다.

‘나도 저런 걸 배워보고 싶다.’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요리가 싫어서 멀어진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일을 먼저 하며 살았을 뿐이었다.

어느 날 아주 단순한 생각이 들었다.

 

‘평생 이렇게 생각만 할 건가?’

그 질문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내년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몇 년 뒤에도

‘그때 해볼걸.’

하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때 처음으로 시간을 거꾸로 생각해보았다.

지금 시작하면 늦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더 늦는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하지만 결심했다고 바로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배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낯설었다.

나는 오랫동안 누군가를 챙기는 역할에 익숙해져 있었다.

 

엄마.

아내.

가족의 식탁을 책임지는 사람.

그런 내가 다시 ‘학생’이 되어 누군가에게 배우는 모습을 상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틀리고,

다시 하고,

처음부터 익혀가는 사람.

 

나는 오랫동안 ‘알아야 하는 사람’으로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

그런데 요리 앞에서는 그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컸다.

 

칼질 하나에도 이유가 있고,

불의 세기에도 원리가 있고,

재료를 다루는 방법에도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알수록 더 궁금했다.

 

집에서 오래 해온 요리와 전문적으로 배우는 요리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왜 이렇게 써는지.

왜 이 순서로 넣는지.

 

왜 이 온도가 중요한지.

왜 이 그릇이 더 어울리는지.

나는 다시 질문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잘할 수 있을까?’

계속 그 질문만 하다가 어느 날 질문을 바꿨다.

 

‘배워보고 싶은가?’

그 질문에는 대답이 빨랐다.

 

‘응.’

그럼 됐다.

처음부터 잘할 필요는 없었다.

 

배우러 가는 사람이니까.

모르니까 배우는 것이고, 서툴기 때문에 연습하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사실인데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예전에도 그랬다.

학교가 끝나면 부엌에서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처음부터 잘하지 못했다.

찢어지고,

간이 맞지 않고,

모양도 마음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계속했다.

좋아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어린 나와 지금의 내가 그렇게 다른 것도 아니었다.

나이가 조금 더 들었고,

해야 할 일이 조금 더 많아졌고,

 

겁이 조금 많아졌을 뿐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자주 ‘늦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늦었다는 기준은 참 애매하다.

누구보다 늦은 것인지,

무엇보다 늦은 것인지.

 

삶에는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표가 없는데 우리는 자꾸 남의 시간표를 바라본다.

누군가는 스무 살에 시작하고,

누군가는 서른에 시작한다.

 

또 누군가는 한참 후에 자신의 길을 찾기도 한다.

그런데 시작하는 순간만큼은 모두에게 첫날이다.

 

그 생각이 참 좋았다.

‘나에게도 다시 첫날이 있으면 되는 거구나.’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나니 일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배울 수 있는 수업.

읽어보고 싶은 책.

익히고 싶은 기술.

도전해보고 싶은 자격.

 

하나씩 보였다.

사람의 마음은 참 신기하다.

 

길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가보겠다고 마음먹으면 작은 길들이 보인다.

그렇다고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도 있었고,

해야 할 일도 있었고,

시간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했다.

하루 중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을 찾았다.

 

짧게라도 책을 보고,

배우고 싶은 것을 메모하고,

수업 정보를 찾아보았다.

 

노트 한쪽에 적었다.

‘이것도 해보고 싶다.’

‘이것도 배우고 싶다.’

그 노트가 조금씩 채워졌다.

 

오랜만에 내 이름으로 된 계획이 생긴 기분이었다.

가족을 위한 계획은 늘 있었다.

 

오늘 저녁 메뉴.

아이 일정.

집안일.

해야 할 일.

 

하지만

‘내가 배우고 싶은 것’

‘내가 되고 싶은 모습’

을 적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조금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배우고,

내가 조금 더 행복해지는 것이 가족에게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엄마도 한 사람이고,

아내도 한 사람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에게도 자기 이름과 꿈이 있다.

 

나는 거창한 성공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였다.

 

‘제대로 한번 배워보고 싶다.’

오랫동안 감으로 해왔던 요리를 이론과 기술로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이 왜 그런지 알고 싶었고,

모르던 것은 새롭게 배우고 싶었다.

 

아직 ‘한식대가’라는 이름도,

‘교수’라는 이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시 앞치마를 묶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 하면 사람은 자꾸 끝부터 걱정한다.

 

끝까지 할 수 있을까.

성과가 있을까.

사람들이 인정해줄까.

나도 그랬다.

하지만 어느 날 생각했다.

 

끝은 아직 몰라도 된다.

첫날을 시작하지 않으면 둘째 날은 오지 않는다.

요리도 처음부터 완성된 접시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재료를 씻고,

썰고,

불을 켜고,

한 단계씩 만들어간다.

 

삶의 새로운 시작도 그와 비슷했다.

마음이 흔들리는 날이면 부엌에 섰다.

 

좋아하는 재료를 손질하고,

천천히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면 복잡하던 생각이 조금 단순해졌다.

 

요리는 늘 그랬다.

눈앞에 있는 한 가지에 집중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날의 답은 대부분 비슷했다.

‘해보고 싶다면 해봐.’

나는 어쩌면 오랫동안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이제 해도 돼.”

라고 말해주는 사람.

하지만 그런 사람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내가 나에게 말하면 되는 것이었다.

“해도 돼.”

짧은 말이었지만 생각보다 큰 힘이 있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버리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 가지고 가는 일이었다.

 

아이를 키우며 배운 기다림.

가족의 식탁을 차리며 얻은 생활력.

냉장고 속 재료를 활용하며 생긴 감각.

 

사람의 입맛을 살피며 배운 배려.

예쁜 식탁을 만들며 익힌 색과 여백.

그 모든 경험이 이미 내 안에 있었다.

 

나는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새로운 길을 시작하지만, 빈손으로 가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나이가 든 만큼 늦어진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본 만큼 가진 것도 많았다.

책만으로는 배우기 힘든 것들이 내 안에 있었다.

 

사람을 돌본 경험.

실패해본 경험.

매일 식탁을 차려본 경험.

시간이 없을 때도 한 끼를 완성해본 경험.

 

그 모든 삶이 언젠가 나의 요리 안에서 쓰일 것 같았다.

나는 오래전 어린 경은이를 떠올렸다.

 

핑크색 리본을 좋아하고,

꽃무늬 접시에 음식을 담고,

학교가 끝나면 부엌으로 향했던 아이.

 

그 아이에게 물었다면 대답은 아주 간단했을 것이다.

“요리 다시 배우고 싶어?”

“응.”

“왜?”

“좋으니까.”

 

어른이 된 나는 너무 많은 이유를 붙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그 단순한 마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보다 배우는 즐거움을 먼저 생각하기로 했다.

남보다 빨리 가는 것보다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시작이 조금 덜 무서워졌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었다.

 

특별한 타이틀도 없었고,

본격적인 공부도 시작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내 마음속 문장이 달라졌다.

‘나는 못 해.’

에서

 

‘나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해볼까?’

에서

 

‘해보자.’

사람의 인생은 때로 그 짧은 문장 하나에서 방향이 바뀐다.

앞으로의 나는 정말로 다시 앞치마를 묶게 된다.

 

학생이 되어 배우고,

처음부터 다시 칼을 잡고,

감으로 해오던 요리에 이유를 붙이게 된다.

 

실수도 하고,

시험도 보고,

때로는 지치기도 한다.

 

그래도 계속한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의 시작점에는 거창한 선언이 없었다.

 

아주 작은 질문 하나였다.

“나도 다시 시작해도 될까?”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나에게 대답했다.

 

“응. 지금부터 시작해도 돼.”

좋아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면 다시 시작할 이유는 충분했다.

앞치마는 아직 완전히 묶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끈을 잡고 있었다.

 

오래 접어두었던 꿈을 꺼내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설렜다.

 

그러면 됐다.

내 인생의 다음 장은 바로 그 마음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경은의 한마디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 내가 나에게 ‘이제 해도 돼’라고 말해주는 순간이 필요할 뿐이다.”

 

오늘의 핑크 한스푼

오래 미뤄둔 일이 있다면 오늘 아주 작은 첫걸음 하나만 만들어보세요.

 

배우고 싶었던 수업을 찾아보거나,

책 한 권을 펼치거나,

노트 첫 페이지에 하고 싶은 것을 한 줄 적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오늘 당장 인생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마음을 한스푼 더하는 것.

그 한스푼이 새로운 인생의 첫 페이지가 될지도 모릅니다.

 

 

 

작성 2026.09.20 22:15 수정 2026.09.20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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