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학생일 때는 시간이 없어서 못 하고, 돈이 없어서 못 하고, 아직 어리기 때문에 못 하는 일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막연히 기대했다.
‘어른이 되면 다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막상 어른의 문 앞에 서보니 세상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묻기보다는 해야 할 일이 먼저 찾아왔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했고, 꿈보다 현실이라는 단어가 더 자주 앞에 놓였다.
나는 그렇게 꿈을 충분히 펼쳐보기도 전에 조금 일찍 어른이 되어갔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학교가 끝나면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보고,
남아 있는 재료를 꺼내보고,
무엇을 만들어볼까 생각하는 시간이 좋았다.
예쁜 접시를 보면 설렜고, 꽃 한 송이가 놓인 식탁을 보면 마음이 움직였다.
그때는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질문은 달라졌다.
“그걸 좋아해서 뭐 할 건데?”
“앞으로 어떻게 살 거야?”
“무슨 일을 할 거야?”
좋아한다는 대답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나는 점점 좋아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답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참 이상했다.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살고 있는데 해야 할 일이 하나씩 늘어났다.
내가 결정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고,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도 생겼다.
어릴 때는 엄마가 해주던 일들을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해야 했다.
누군가가 정해주는 시간표 대신 내 삶의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정작 그 시간표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위한 자리는 점점 작아졌다.
요리는 여전히 좋았다.
다만 예전처럼 마음껏 요리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부엌에 오래 서 있을 여유가 없는 날도 있었고,
무언가를 새롭게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지금 그럴 때가 아니지.’
하며 마음을 접을 때도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먼저 현실을 계산했다.
시간이 되는지,
형편이 되는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그러다 보면 마음은 자꾸 뒤로 밀렸다.
그 시절에는 그것을 포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이런 걸 꿈꿀 때가 아닌가 보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꿈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잠시 다른 곳에 놓아둔 것이었다.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가끔 예쁜 음식 사진을 보면 여전히 오래 바라봤다.
그릇을 보면
‘여기에 뭘 담으면 예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 괜히 가까이 가서 보고 싶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생활 속에서도 요리는 계속되었다.
거창한 요리를 만들지는 못해도 한 끼를 차렸다.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를 살피고,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어릴 때 놀이처럼 했던 일이 이제는 생활이 되었다.
그 변화가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다.
좋아서 하던 요리와 해야 해서 하는 요리는 분명 느낌이 달랐다.
어떤 날은 즐거웠고,
어떤 날은 귀찮았고,
어떤 날은 부엌에 서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한 끼가 완성되면 마음 한편이 놓였다.
‘오늘도 밥은 차렸구나.’
요리는 나에게 현실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음식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장을 봐야 했고,
재료를 다듬어야 했고,
시간을 맞춰야 했고,
먹고 난 뒤에는 설거지도 해야 했다.
예쁜 접시 위의 한 끼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보이지 않는 일이 필요했다.
삶도 비슷했다.
누군가 보기에는 평범한 하루였지만 그 하루를 지켜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시간을 지나며 조금씩 단단해졌다.

젊은 시절의 나는 가끔 어린 나를 부러워했다.
좋아하는 것만 생각해도 되었던 아이.
핑크색 리본 하나만 있어도 행복했던 아이.
계란말이 하나를 잘 만들고 하루 종일 뿌듯해했던 아이.
‘그때는 참 좋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때는 몰랐다.
그 어린 마음이 언젠가 다시 나를 움직이게 할 것이라는 것을.
사람은 바쁘게 살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잊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한 순간에 다시 나타난다.
음식 하나를 보다가,
향 하나를 맡다가,
예쁜 접시를 만나다가,
마음이 아주 조금 움직인다.
‘나 이거 좋아했지.’
그 작은 움직임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나는 지금 그렇게 생각한다.
당시의 나는 특별한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주어진 일을 감당하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때로는 그것만으로 하루가 꽉 찼다.
꿈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나중에.’
참 많이 했던 말이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상황이 좋아지면.
시간이 나면.
나중에.
그런데 인생에서 완벽하게 여유로운 ‘나중’은 쉽게 오지 않았다.
지금 학생들을 보면 가끔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교수님, 저는 너무 늦은 것 같아요.”
“지금 시작해도 될까요?”
그 말을 들으면 나는 쉽게 대답한다.
“괜찮아요. 시작하면 돼요.”
아마 내가 그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나 역시 꿈보다 현실을 먼저 살았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에는 사람마다 다른 순서가 있다.
누군가는 일찍 꿈을 찾고,
누군가는 조금 돌아간다.
누군가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시작한다.
빠른 길만 좋은 길은 아니다.
돌아가는 시간에도 배우는 것이 있다.
나는 생활 속에서 사람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하루가 얼마나 힘든지,
따뜻한 한 끼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화려하지 않은 집밥이 얼마나 소중한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 경험은 훗날 내가 요리를 바라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요리는 멋진 접시 하나를 만드는 일로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하루를 돌보는 일이기도 했다.
어릴 때는 음식이 예쁘면 좋았다.
젊은 시절에는 음식이 사람을 먹이고 하루를 버티게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
맛있게.
예쁘게.
하지만 무엇보다 먹는 사람에게 따뜻하게.
내 요리가 조금씩 깊어진 데에는 생활을 먼저 배운 시간도 분명히 있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는 화려한 조리복도 없었다.
이름 앞에 붙는 특별한 호칭도 없었다.
누군가 나를 전문가라고 불러주는 일도 없었다.
그저 하루의 식탁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이 결코 비어 있지 않았다.
수많은 한 끼가 쌓였다.
재료를 고르는 눈이 생겼고,
있는 것으로 음식을 만드는 힘이 생겼고,
사람의 입맛을 생각하는 습관이 깊어졌다.
생활이 나에게 또 다른 요리학교였던 셈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꿈을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조금 늦게 알았다.
꿈을 잠시 뒤로 미룰 수는 있다.
다른 일을 먼저 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까지 없애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 한구석에 잘 두어도 된다.
조금 늦게 다시 꺼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요리를 잊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요리를 하고 있었다.
가족의 식탁을 차리고,
냉장고 속 재료를 살피고,
음식의 색을 보고,
접시를 고르고,
먹는 사람의 표정을 바라봤다.
어린 시절부터 해왔던 일들이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내 꿈은 멈춘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자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가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난다면 말해주고 싶다.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꿈을 바로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야.”
“지금 네가 살아내고 있는 시간도 언젠가 다 너의 것이 될 거야.”
그리고 하나 더.
“네가 좋아했던 것을 잊지 마.”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원했던 시기에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게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오히려 나만의 깊이가 되기도 한다.
나는 생활을 먼저 알았기에 음식을 먹는 사람의 마음을 더 생각하게 되었다.
현실을 먼저 살았기에 다시 꿈을 꺼냈을 때 더 간절했다.
꿈보다 먼저 어른이 되었다.
한때는 그 순서가 아쉬웠다.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먼저 살아본 시간들이 있었기에 다시 시작했을 때 나는 예전의 어린 경은이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금 더 단단했고,
조금 더 사람을 이해했고,
한 끼의 소중함도 알고 있었다.
꿈은 조금 늦게 다시 찾아왔지만,
그 꿈을 담아낼 나는 더 깊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직 그때의 나는 모른다.
잠시 뒤로 미뤄둔 꿈을 언젠가 다시 꺼내게 될 것을.
다시 앞치마를 묶고,
다시 학생이 되고,
요리를 제대로 배우고,
마침내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사람이 될 것을.
인생의 다음 장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불씨 하나는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나는 요리가 좋다.”
그 마음이면 충분했다.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 늦게 피기 위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경은의 한마디
“꿈을 잠시 미뤘다고 해서 꿈을 잃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살아낸 시간이 꿈을 더 깊게 만들어준다.”
오늘의 핑크 한스푼
혹시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미뤄두고 있나요?
당장 시작할 수 없다고 해서 마음속에서까지 지우지는 마세요.
좋아하는 책을 한 페이지 읽어도 좋고,
배우고 싶은 것을 검색해봐도 좋고,
작은 노트에 하고 싶은 일을 적어두어도 좋습니다.
미뤄둔 꿈을 잊지 않도록 작은 마음 하나를 한스푼 더해보세요.
언젠가 다시 시작할 날이 왔을 때 그 작은 마음이 가장 먼저 당신을 일으켜줄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