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은 교수의 요리에세이 『오늘도 핑크 한스픈』9화

가방을 내려놓으면 자연스럽게 냉장고 문부터 열어보던 소녀 경은이의 방과 후

남은 재료로 이것저것 만들어보며 실패까지 즐거운 배움으로 바꾸었던 시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꾸 향했던 부엌이 훗날 요리 인생의 길이 되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은 각자 좋아하는 곳으로 흩어졌다.

 

 

 

9화. 학교가 끝나면 부엌으로

 

누군가는 친구들과 문구점에 들렀고, 누군가는 운동장에 남아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자꾸 음식 생각을 했다.

 

‘오늘은 집에 뭐가 있지?’

냉장고 안에 계란이 있었는지, 어제 먹다 남은 채소가 있었는지, 엄마가 장을 봐두었는지 문득문득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이상한 학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숙제보다 냉장고 속 재료가 먼저 생각났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때 내가 요리사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부엌이 좋았다.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재미있었고,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시간이 좋았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면 가방부터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부엌 쪽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계란 몇 개.

대파 조금.

당근 반 토막.

반찬통에 남아 있는 나물.

 

그때는 지금처럼 멋진 재료가 있어야 요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있는 것으로 뭔가를 만들면 됐다.

계란이 있으면 계란말이를 해보고,

밥이 남아 있으면 볶음밥을 만들어보고,

채소가 조금씩 남아 있으면 한데 모아 볶아보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맛있었고,

어떤 날에는 내가 먹어도 조금 애매했다.

그래도 이상하게 다시 해보고 싶었다.

 

‘다음에는 조금 덜 짜게 해야겠다.’

‘당근은 더 작게 썰어야겠다.’

‘불을 조금 약하게 해야 하나?’

실패했다고 생각하기보다 다음 방법이 궁금했다.

 

그 마음이 나를 자꾸 부엌으로 데려갔다.

학생이던 나에게 부엌은 작은 실험실 같았다.

학교에서는 정답이 있었다.

 

시험지에는 맞는 답과 틀린 답이 분명했다.

하지만 부엌에서는 조금 달랐다.

 

간장을 조금 더 넣어도 음식이 되었고,

재료 하나를 빼도 또 다른 맛이 나왔다.

정답이 하나가 아니었다.

 

그게 좋았다.

누군가 정해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맛보고 결정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

내가 판단하고,

내가 다시 고치고,

마지막에는 누군가에게 먹여본다.

 

그 과정이 재미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됐던 것은 아니다.

계란말이는 자꾸 찢어졌다.

 

뒤집는 순간 모양이 망가지기도 했다.

볶음밥은 밥알이 고슬고슬하기보다 뭉쳐버릴 때도 있었다.

간을 잘못해 물을 마셔야 할 만큼 짠 음식도 있었고,

반대로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싱거운 날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속상했다.

그래도 버리기보다는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다.

 

짜면 밥을 더 넣고,

싱거우면 간을 조금 더하고,

모양이 망가지면 접시에 예쁘게 담아보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부터 요리에서 꽤 중요한 것을 배우고 있었다.

 

완벽하게 시작하는 것보다 끝까지 완성해보는 것.

어느 날은 계란말이가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예쁘게 돌돌 말고 싶었는데 중간이 터져버렸다.

 

‘망했다.’

순간 속상했다.

그런데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조각을 가지런히 썰어 접시에 담았다.

옆에 있던 채소도 조금 놓아봤다.

조금 떨어져서 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어? 나쁘지 않은데?”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요리는 만드는 과정에서 한번 실패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 다르게 담고,

조금 다르게 고치면,

또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었다.

 

훗날 학생들의 요리가 생각처럼 되지 않았을 때 내가 쉽게

“다시 한번 해봐요.”

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어쩌면 그런 경험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음식을 만들고 나면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식탁에 음식을 올려놓고 누군가 젓가락을 들면 슬쩍 본다.

 

‘먹는다.’

그리고 한입.

그다음 표정을 본다.

 

“어때?”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내가 만들었어.”

칭찬을 들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맛있네.”

그 말 한마디면 학교에서 있었던 피곤한 일도 조금 잊혔다.

 

내가 만든 것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아마 그때부터 요리는 내게 단순히 먹을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조금씩 달라지는 시기였다.

누군가는 음악을 좋아했고,

누군가는 옷과 화장에 관심이 생겼고,

누군가는 운동을 좋아했다.

 

나는 예쁜 것도 여전히 좋아했지만 이상하게 음식과 그릇을 보면 오래 바라봤다.

시장에 가면 채소 색깔이 눈에 들어왔고,

그릇을 보면 어떤 음식을 담으면 좋을지 상상했다.

잡지나 책에서 음식 사진을 발견하면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담았지?’

‘저 초록색은 뭘까?’

‘이 접시는 왜 더 예뻐 보이지?’

그때는 그것이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좋아서 본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도 모두 공부였다.

 

좋아하는 것은 이상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꾸 하게 된다.

숙제는 누군가 말해야 할 때가 있었지만,

 

요리는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

라고 해도 냉장고를 열어봤다.

뭐라도 하나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 차이를 나중에야 알았다.

사람에게 정말 맞는 일은 억지로 오래 붙잡고 있지 않아도 자꾸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힘들어도 다시 하고 싶고,

실패해도 궁금하고,

잘된 날에는 또 하고 싶어진다.

 

나에게 요리가 그랬다.

그리고 나는 요리를 하면 마음이 조용해지는 것이 좋았다.

 

학교에서는 여러 사람과 함께 있고,

수많은 말을 듣는다.

해야 할 일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다.

그런데 칼을 잡고 채소를 썰기 시작하면 눈앞의 일에 집중하게 된다.

 

도마 위에서 일정한 소리가 난다.

톡, 톡, 톡.

팬에서는 재료가 익는 소리가 들린다.

 

지글지글.

냄비에서는 따뜻한 김이 올라온다.

그 시간만큼은 다른 생각이 조금 멀어졌다.

 

나는 그게 편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이 그런 시간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림이 그런 시간이 될 것이다.

 

나에게는 부엌이었다.

부엌에 서 있으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했다.

 

씻고,

썰고,

볶고,

맛보고,

담는다.

하나씩 해나가면 결국 한 접시가 완성된다.

 

일이 눈앞에서 변하는 것이 좋았다.

당근 하나도 썰어놓으면 달라지고,

생채소도 불을 만나면 향과 색이 달라진다.

 

아무것도 없던 접시 위에 음식이 놓인다.

나는 그런 변화가 재미있었다.

 

요리하면서 나는 작은 성취감도 배웠다.

오늘 계란말이가 어제보다 잘 말렸을 때.

볶음밥의 간이 딱 맞았을 때.

가족이 한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을 때.

 

누군가

“또 해줘.”

라고 말했을 때.

그것들은 모두 아주 작은 성공이었다.

 

학교 성적표에는 적히지 않는 성공.

상장을 받을 일도 아닌 성공.

하지만 내 마음에는 오래 남았다.

 

‘나 이거 조금 잘하는 것 같은데.’

그 생각이 들면 다음에는 더 잘하고 싶었다.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나는 그런 작은 성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어려운 요리를 완벽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칼질이 어제보다 조금 나아지고,

소스의 간을 스스로 맞춰보고,

처음으로 자신이 만족하는 접시 하나를 완성하는 것.

 

그런 경험이 쌓이면 사람이 달라진다.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을 하는 학생의 얼굴을 보면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학교가 끝나면 부엌으로 향하던 아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냉장고 문을 열어보던 아이.

엄마는 그런 나를 특별히 말리지 않았다.

 

때로는 옆에서 한마디씩 알려주었다.

“불 너무 세게 하지 마.”

“그건 먼저 넣으면 안 돼.”

“간은 마지막에 다시 봐.”

그때는 잔소리처럼 들린 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짧은 말 하나하나가 꽤 중요한 요리 수업이었다.

특히

“맛을 봐.”

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지금 나도 학생들에게 같은 말을 한다.

“맛봤어요?”

그럴 때면 조금 웃음이 난다.

엄마에게 들었던 말이 내 입에서 그대로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요리와 함께 예쁜 것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았다.

맛있게 만들고 나면 그대로 먹기보다 접시에 한번 담아보고 싶었다.

계란말이를 그냥 놓는 대신 길이를 맞춰 잘랐다.

 

볶음밥을 그릇에 꾹 눌러 담았다가 접시에 뒤집어보기도 했다.

초록색이 부족해 보이면 대파를 조금 올렸다.

빨간색이 있으면 예쁠 것 같아 토마토를 옆에 놓기도 했다.

 

지금 보면 너무 단순한 플레이팅이다.

하지만 내게는 꽤 즐거운 일이었다.

요리를 완성하는 마지막 놀이 같았다.

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런 작은 습관들이 나중에 내가 하는 일과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음식을 가르치고,

한 접시의 색과 모양을 이야기하고,

학생들의 요리를 보며 조언하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당시의 나는 그냥 방과 후에 요리를 좋아하는 학생일 뿐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었다.

직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냥 재미있었다.

 

살다 보면 좋아하는 일을 너무 빨리 결과와 연결하려 할 때가 있다.

‘이걸 해서 뭐가 될까?’

‘돈이 될까?’

‘잘할 수 있을까?’

그 질문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이걸 할 때 즐거운가?”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질문에 이미 답하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부엌으로 갔으니까.

시간이 나면 뭔가를 만들었으니까.

실패하고도 다시 해봤으니까.

누군가 맛있다고 하면 그렇게 행복했으니까.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나는 꿈을 정한 것이 아니라 꿈의 방향을 몸으로 찾아가고 있었다.

아직 이름은 몰랐다.

 

‘요리하는 사람.’

‘한식대가.’

‘교수.’

 

그 어떤 이름도 없었다.

그저 음식이 좋았고,

예쁜 접시가 좋았고,

누군가 잘 먹는 모습이 좋았다.

 

그 좋아하는 것들이 하나씩 이어져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도 가끔 말한다.

 

“좋아하는 것을 너무 쉽게 지나치지 마세요.”

남들이 보기에 사소한 관심이라도 괜찮다.

 

자꾸 눈이 가는 것.

계속 해보고 싶은 것.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하는 것.

그 안에 자신의 길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내게는 부엌이 그랬다.

학교가 끝난 뒤 잠깐 머물던 공간이었지만,

그곳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미래의 나를 조금씩 만들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오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가방을 내려놓고,

냉장고를 열고,

재료를 꺼내고,

앞치마를 두른다.

 

창으로 오후 햇살이 들어오고,

도마 위에 채소가 놓인다.

나는 무엇을 만들지 생각한다.

 

아직 서툴고,

모르는 것도 많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꽤 행복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학교가 끝나면 부엌으로.

당시에는 그냥 하루의 습관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길은 생각보다 훨씬 멀리 이어져 있었다.

집의 작은 부엌에서 시작해,

요리를 배우는 교실로,

수많은 사람의 식탁으로,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금의 자리까지.

아마 인생의 길은 처음부터 커다란 표지판을 세워놓고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 것 같다.

 

작은 좋아함 하나가,

작은 습관 하나가,

매일 같은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 하나가 길을 만든다.

 

나는 그 길의 시작을 기억한다.

가방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향하던 어린 경은이.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계속 해도 돼. 네가 좋아하는 그 시간이 언젠가 너의 일이 될 거야.”

 

경은의 한마디

“꿈은 어느 날 갑자기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 하고 싶은 일을 오래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길이 되어 있다.”

 

오늘의 핑크 한스푼

오늘 하루가 끝났을 때 한번 생각해보세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꾸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시간이 나면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곳은 어디인가요?

 

아주 사소해 보여도 좋습니다.

그 마음을 무시하지 말고 오늘 단 10분이라도 해보세요.

 

좋아하는 일을 위한 작은 시간을 한스푼 더하는 것.

어쩌면 그 시간이 먼 훗날 나만의 길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작성 2026.09.12 23:34 수정 2026.09.1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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