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작구 상도동 ‘금화사 금화도령’ 금화도령 선생 |
동작구 상도동의 한 공간. 겉으로 보면 누군가의 집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신을 모신 법당이자 누군가에게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상담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금화사 금화도령’을 운영하는 금화도령 선생을 만났다.
그가 처음부터 무속인의 길을 꿈꿨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삶의 대부분은 전혀 다른 길 위에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을 반복해서 겪었지만 그것을 외면했고, 연예인을 꿈꾸던 청년 시절에는 연기를 생각했다. 이후 네일아트 강사로 이름을 알렸고, 타일 시공 현장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몸과 삶이 동시에 멈춰 서는 듯한 시간을 지나면서, 그는 자신이 외면해왔던 길과 마주하게 됐다.
지금 그는 그 길을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 사진 = 금화사 금화도령 |
“어릴 때부터 보이면 안되는 것들이 보였습니다”
금화도령 선생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기억하는 첫 경험은 여덟 살 무렵이었다. 하늘을 날아가는 엄청나게 큰 새를 보았다.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의 그는 그 존재를 봉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더욱 특별했던 것은 그 모습이 자신에게만 보였다는 점이다.
그 이후에도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거나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리는 경험이 이어졌다. 그러나 어린 그에게 그것을 이해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외면이었다.
“보여도 안 보이는 척하고, 들려도 안 들리는 척하면서 살려고 했어요.”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삶에는 여러 굴곡이 찾아왔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산동네로 이사를 가기도 했고,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 시작했다.
원래 꿈은 연예계였다. 특히 연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의 반대가 있었고,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을 고민하다 미용 분야에 발을 들였다.
스무 살부터 시작한 네일아트는 생각보다 잘 맞았다. 그는 네일아트 강사로도 활동했고, 직접 숍을 운영하기도 했다.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분야에 몰입하면서 당시에는 자신의 이름 석 자만으로도 업계에서 알아주는 수준까지 실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반복되는 일이 있었다. 무언가 크게 올라갈 것 같은 순간이면 꼭 막힘이 찾아왔다.
▲ 사진 = 금화사 금화도령 |
“잘 풀리는 순간마다 이상하게 길이 막혔습니다”
35세 무렵, 그는 또 한 번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앞으로는 이 세 가지 업종이 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중 하나였던 타일 시공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약 5년 동안 타일 시공을 하면서 현장에서 인정받았다. 하지만 39세가 되던 해, 모든 것이 갑자기 끊겼다.
일이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명함을 돌리고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시기에 보험설계 일을 권유받았다. 그렇게 보험까지 시작했는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약 3개월 동안 타일 시공과 보험에서 동시에 일이 터지면서 한 달에 약 1,500만 원 정도를 벌었다.
그런데 정확히 3개월이 지나자 다시 일이 끊겼다.
당시에는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 시간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3개월 동안 내림을 받고 신상을 차리는 데 필요한 비용을 딱 벌게 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뒤부터 몸에서 이상한 변화가 시작됐다.
▲ 사진 = 금화사 금화도령 |
“아픈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웠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몸의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싶었고,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통증의 강도와 빈도가 모두 심해졌다.
진통제가 없으면 생활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당시 진통제를 하루에 몇 차례씩 마치 간식처럼 먹으며 버텼다고 회상한다.
밤이 되면 또 다른 현상이 찾아왔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치맛자락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희미하게 방울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무엇을 겪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처음에는 고통스럽다기보다 ‘이게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이 먼저였어요. 그런데 점점 빈도가 짧아지고 강도가 세지니까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결국 병원을 예약했다. 동시에 여러 무속인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여러 곳에서 돌아온 답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너는 해야 돼.”
그 말뿐이었다.
▲ 사진 = 금화사 금화도령 |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제발 안 아프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단 한마디를 내뱉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안 아프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 말을 한 뒤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져 있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졌던 경험과 이후의 삶을 하나씩 되짚어보니 모든 것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마흔 살이 되던 해, 그는 내림을 받았다.
현재 햇수로 5년째. 그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시며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 사진 = 금화사 금화도령 |
무속인이 되던 날, 그가 가장 먼저 자신에게 한 약속
무속인의 길에 들어선 뒤 그가 가장 먼저 마음속에 새긴 것은 돈도, 유명세도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는 무당이 되자.’
그는 신굿을 받던 날 스스로에게 그렇게 다짐했다고 말한다.
무속인 역시 결국 사람이다.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길 수도 있고, 손님이 없어 불안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자신의 초심만큼은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원칙은 지금도 상담 방식에 그대로 이어진다.
누군가에게 초나 부적, 굿 등의 의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설명한다. 그러나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는다. 굿 역시 마찬가지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공포를 자극하며 강요하기보다는 선택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이러한 의례를 하면 현재 상황이 나아질 수 있지만, 하지 않으면 그만큼의 어려움은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결국 선택은 본인이 하는 거니까요.”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전화라도 좋고 찾아와 하소연이라도 좋다.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 꼽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지금까지 찾아오는 분들을 돈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 그거 하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 ▲ 사진 = 금화사 금화도령 |
한 사람의 삶 앞에서는 ‘점사’보다 먼저 마음을 살펴야 한다
금화도령 선생에게 기억에 남지 않는 내담자는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들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남은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여러 차례 암 수술을 받은 내담자였다. 상담 과정에서 그는 이미 큰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상담이 끝난 뒤 그 사람이 물었다.
“저 살 수 있나요?”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을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
“충분히 살 수 있고 좋아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엄밀히 말하면 그에게는 일종의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그 순간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삶을 얼마 남기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그 순간부터 스스로 삶을 내려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그 사람을 위해 일정 기간 정성을 들여 기도했다. 지금 그 사람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만큼은 어떻게든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아주고 싶었다.
또 다른 내담자는 어머니에게 간 이식을 해준 사람이었다. 자신의 간 일부를 어머니에게 이식했지만 어머니가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울면서 전화가 왔다.
금화도령 선생이 가장 먼저 한 말은 의외였다.
“울지 말고 밥부터 먹어.”
어머니를 간호하려면 먼저 자신의 몸부터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날 밤 그는 초 세 자루를 들고 산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눈이라도 뜰 수 있게 해달라고, 혹시라도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눈을 떴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마지막으로 딸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금화도령 선생은 그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무당이 사람을 위해 빌어주는 일을 하지만 마법사는 아니잖아요.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어요. 그래서 그때는 제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건가 싶어서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사람을 살리는 무당이 되겠다고 다짐했기에, 그 한계가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 ▲ 사진 = 금화사 금화도령 |
“신당을 무서운 곳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가 무속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거리 좁히기’다.
무속을 낯설고 무서운 것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신당을 찾아오는 이유 역시 반드시 특별할 필요는 없다. 마음이 힘들 때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서 찾아와도 된다.
그는 이를 교회나 성당, 절과 비교해 설명한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교회에서 마음의 의지를 얻고, 성당을 찾는 사람은 미사와 고해성사를 통해 마음을 내려놓는다. 절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기도하고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에게 신당도 그런 공간 중 하나다.
“그냥 마음 편해지고 싶어서 의지하러 오는 곳이라고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무속이 우리나라에서 오랜 시간 이어져 온 문화라는 점도 강조한다. 특정 종교가 옳고 그르다는 방식으로 접근하기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문화적 역할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 사진 = 금화사 금화도령 |
무속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비’보다 ‘신뢰’다
그는 무속문화가 앞으로 건강하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속인과 방문자 모두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속인은 방문자를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필요하지 않은 굿이나 의례를 비용을 이유로 권하는 일도 사라져야 한다.
반대로 방문자 역시 모든 제안과 상담을 금액적인 측면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꼭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까지 한다. 정말 마음이 간다면 다른 곳에서 기도해도 좋고, 가까운 절에 가서라도 간절하게 기도해보라고 권한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사람이나 장소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무속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도, 무조건적인 배척도 아니다.
예의를 갖추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 그리고 무속인 역시 자신의 역할에 책임을 갖는 것.
그 두 가지가 쌓이면 무속에 대한 신뢰 역시 자연스럽게 커질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 ▲ 사진 = 금화사 금화도령 |
처음의 다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계획입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묻자 그는 거창한 계획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과 똑같은 답을 내놓았다.
힘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는 것.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새벽이라도 움직이고, 멀리 있는 곳이라도 찾아가 기도해주고 싶다는 것.
그에게 미래는 사업의 확장이나 규모의 성장이 아니라 초심의 지속에 가깝다.
“정말 힘든 사람이 있다면 그때도 똑같이 해야죠. 새벽이든 뭐든. 필요하다면 몇 시간을 달려서라도 그 사람을 위해 빌어줘야죠.”
여러 직업을 거치고, 수많은 삶의 굴곡을 지나온 그가 결국 선택한 것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만 보였던 것들을 이해하는 데 4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힘들 때 잠시 기대어 갈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금화도령 선생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 그의 삶은 처음부터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곧게 걸어온 이야기가 아니었다. 연기자를 꿈꾸던 청년이었고, 네일아트 강사였으며, 타일 시공 현장의 기술자이기도 했다. 잘 풀리는 순간마다 막힘을 경험했고,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봐야 했다.
그리고 결국 그가 선택한 길에서 가장 중요하게 붙잡고 있는 단어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미래를 단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힘든 순간에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무엇인가를 무조건 권하기보다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끝까지 손을 놓지 않는 사람.
무속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삶이 흔들릴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금화도령 선생이 자신의 공간을 ‘무서운 신당’보다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곳’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40세에 받아들인 새로운 삶은 이제 5년째를 지나고 있다. 앞으로 그 길이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처음 자신에게 했던 약속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사람을 돈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
그리고 힘든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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