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세계 요리 여행은 남태평양의 섬나라 뉴질랜드로 향한다.
오늘의 주인공은 냄비도 오븐도 아닌 땅속에서 완성되는 음식, 항이(Hāngī)다.
항이는 특정한 한 가지 요리 이름이라기보다, 마오리족이 뜨겁게 달군 돌을 땅속에 묻고 그 열과 수증기로 고기와 채소를 천천히 익히는 전통 조리법과 그 음식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다.
땅을 파고, 불을 피우고, 돌을 달구고, 음식을 넣은 뒤 다시 흙으로 덮는다.
그리고 몇 시간을 기다린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땅속에서는 고기와 채소가 천천히 익어간다.
바로 이 ‘기다림’이 항이의 가장 중요한 조리도구다.
항이의 뿌리는 태평양을 건넌 항해자들에게 있다
마오리족의 조상은 수백 년 전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에서 카누를 타고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그들은 새로운 땅으로 이동하면서 식재료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뜨거운 돌과 땅을 이용해 음식을 익히는 폴리네시아의 지중화덕 조리법도 함께 가져왔다.
태평양 여러 섬에는 이와 비슷한 땅속 조리문화가 존재한다.
하와이의 ‘이무(imu)’, 사모아의 ‘우무(umu)’ 등도 같은 계열의 조리법이다.
뉴질랜드에 정착한 마오리족은 새로운 자연환경과 식재료에 맞게 이 조리법을 발전시켰고, 그것이 오늘날의 항이 문화로 이어졌다.

항이는 먼저 ‘땅을 파는 것’에서 시작한다
항이를 만드는 날에는 먼저 적당한 장소를 정해 땅에 구덩이를 판다.
그 안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돌을 넣어 오랫동안 달군다.
돌이 충분히 뜨거워지면 불탄 나무를 정리하고 음식 준비를 시작한다.
전통적으로는 고기와 뿌리채소 등을 나뭇잎이나 식물 재료로 감싸거나 바구니에 담았다.
오늘날에는 철망 바구니나 천, 포일 등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뜨겁게 달군 돌 위에 음식이 담긴 바구니를 올리고, 젖은 천이나 식물 재료로 덮는다.
마지막으로 흙을 덮어 뜨거운 증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한다.
그 순간부터 땅속이 거대한 찜기가 된다.
연기보다 ‘수증기와 열’로 익힌다
항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비큐와 다르다.
고기가 불꽃에 직접 닿지 않는다.
달궈진 돌에서 나온 열과 음식 주변에 생긴 수증기가 천천히 재료를 익힌다.
그래서 고기는 부드러워지고 채소에는 육즙과 향이 스며든다.
오랜 시간 땅속에서 조리되기 때문에 음식에는 일반적인 오븐이나 냄비 요리와는 다른 은은한 흙내음과 훈연 풍미가 남기도 한다.
몇 시간 뒤 흙을 걷어내는 순간이 항이의 하이라이트다.
덮개를 들어 올리면 뜨거운 김이 한꺼번에 올라오고, 그 안에서 부드럽게 익은 고기와 채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항이에는 무엇을 넣을까?
오늘날 항이에는 양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감자와 호박, 양배추 같은 채소가 함께 들어간다.
특히 빠지지 않는 재료 가운데 하나가 쿠마라(Kūmara)다.
쿠마라는 뉴질랜드에서 오래전부터 재배해온 고구마 계열의 뿌리채소로, 마오리 음식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기의 육즙과 뜨거운 증기를 머금고 익은 쿠마라는 달콤하고 부드러워진다.
그래서 항이는 고기요리이면서 동시에 뿌리채소의 맛을 충분히 즐기는 음식이기도 하다.
항이는 혼자 만들기 어려운 음식이다
항이의 진짜 의미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구덩이를 파야 하고 장작을 준비해야 하며 돌을 달구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양의 고기와 채소를 손질하고 음식 바구니를 준비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래서 항이는 본래 한 사람이 간단히 만들어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가족과 친척, 공동체 사람들이 함께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군가는 불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식재료를 손질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리법과 전통을 배운다.
음식을 만드는 시간이 곧 공동체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결혼식과 축제, 귀한 손님을 맞는 날
마오리 공동체에서 항이는 중요한 모임과 축제에서 특히 의미 있는 음식으로 이어져 왔다.
결혼식이나 가족 행사, 공동체 모임 그리고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먹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커다란 항이 하나를 준비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식사할 수 있다.
그래서 항이는 단순한 조리법을 넘어 환대와 나눔을 보여주는 음식문화가 됐다.
큰 쟁반과 그릇에 익힌 고기와 채소를 넉넉하게 담아 모두 함께 나눈다.
음식을 얼마나 화려하게 장식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먹느냐다.
현대의 항이는 조금 달라졌다
오늘날 뉴질랜드에서는 전통적인 땅속 항이뿐 아니라 현대적인 방식도 등장했다.
스테인리스 장비나 가스·증기를 활용하는 이른바 현대식 항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도시에서는 땅을 직접 파기 어려운 만큼 현실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핵심 원리는 여전히 비슷하다.
뜨거운 열과 수증기로 오랜 시간 천천히 익힌다.
그리고 중요한 날 사람들이 모여 함께 먹는다.
조리도구는 변했지만 음식이 가진 공동체의 의미는 남아 있다.
땅을 열어야 비로소 시작되는 식사
항이를 처음 만드는 사람에게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완성된 음식보다 오히려 땅을 다시 파헤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몇 시간 동안 음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덮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뜨거운 증기가 피어오른다.
그 속에서 익은 고기와 쿠마라, 채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기다렸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모인다.
그래서 항이는 ‘요리가 완성됐다’라는 말보다 ‘이제 함께 먹을 시간이 됐다’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우리가 솥뚜껑을 열면서 밥 냄새를 맡듯, 마오리 사람들은 땅을 열어 음식과 마주했다.
조리법은 전혀 달라도 음식을 기다리고 가족이 모이는 마음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항이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고기도 쿠마라도 아니다. 불을 피우고 땅을 덮은 뒤 함께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마침내 땅을 열었을 때 한자리에 모이는 ‘사람’이다. 땅속에서 천천히 익은 한 끼가 수백 년 동안 마오리 공동체를 이어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