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이전 세대가 상상하지 못했던 풍요의 한가운데 서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세상의 정보와 상품을 즉시 손에 넣고, 비교적 안전한 사회와 긴 평균 수명을 누린다. 그럼에도 이상하다. 불안은 줄지 않았고, 공허는 오히려 일상이 되었다. 충분히 잘 살고 있음에도 ‘무언가 빠져 있다’는 감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더 많이 벌고, 더 빨리 소비하고, 더 높은 성취를 이뤄도 마음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이 설명되지 않는 허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많은 이들이 이 질문 앞에서 고개를 돌린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곳에서 우리를 잠식한다. 물질이 삶의 중심이 된 시대, 우리는 영성이라는 내면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채 속도만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산업화와 성장의 논리는 사회를 빠르게 바꾸었다. ‘더 많이, 더 빨리’라는 구호는 개인의 삶까지 침투했다. 성취는 숫자로 환산되었고, 삶의 가치는 연봉과 자산, 소비 수준으로 측정되기 시작했다. 교육은 경쟁을 전제로 설계되었고, 노동은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종교나 철학, 사색과 침묵 같은 영역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영성은 실용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뒤편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영성은 단지 종교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자신을 넘어서는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삶의 의미를 묻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힘이다. 그것이 사라질 때 인간은 목표는 많아지되 방향을 잃는다. 사회는 효율적이 되었지만 개인은 고립되었다. 관계는 거래가 되었고, 시간은 투자 대상이 되었다. 이 배경 위에서 오늘의 공허가 자라났다.
심리학은 현대인의 불안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끊임없는 비교와 성과 압박 속에서 자존감은 외부 평가에 종속되었다. 사회학은 개인화된 성공 신화가 공동체의 붕괴를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종교와 철학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의미를 잃을 때, 아무리 풍요로워도 삶은 견디기 어려워진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명상, 요가, 철학 강연, 종교적 전통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이는 유행이 아니라 결핍의 신호다. 물질이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다른 언어로 회복하려는 시도다. 영성은 초월적 믿음일 수도 있고, 일상의 성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물질만능주의는 단기적 효율을 높였지만 장기적 비용을 키웠다. 번아웃은 일상이 되었고, 관계의 파편화는 외로움을 구조화했다. 소비는 위안을 제공하지만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할 뿐이다. 영성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과잉 소비와 과잉 경쟁이었다. 이 구조에서는 누구도 충분히 만족할 수 없다. 반면 영성이 회복될 때 삶의 기준은 바뀐다. 성공은 단일한 지표가 아니라 균형의 문제로 재정의된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해지고, 비교보다 의미가 앞선다. 이는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사회의 지속 가능성과도 연결된다. 공동체를 회복하고, 타인을 수단이 아닌 존재로 인식하는 힘은 영성에서 나온다. 이것이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사회적 자본인 이유다.
영성을 잃은 시대는 질문을 잃은 시대다. 질문이 사라지면 선택은 습관이 되고, 삶은 자동화된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의미를 묻고, 방향을 설정하며, 스스로를 성찰할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물질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되었을 때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무엇이 나를 멈추게 하는가, 무엇이 나를 사람답게 만드는가. 이 질문을 회복하는 순간, 영성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일상의 태도로 돌아온다. 풍요 속의 공허를 넘어서는 길은 더 많이 갖는 데 있지 않다.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있다.
오늘 하루, 속도를 조금 늦추고 질문 하나를 적어 보길 권한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더 많은 성찰을 원한다면 더위즈덤이 제시하는 명상수행과 함께 하라. 삶의 방향을 재정렬하는 작은 실천이 큰 변화를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