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속 고독은 편지 속 열정으로 피어난다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이름은 강렬한 색채, 광기, 그리고 비극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반 고흐, 영원한 예술의 시작》(위즈덤하우스, 2024)은 그런 낭만적 신화를 벗겨내고, ‘인간 고흐’의 숨결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이 책은 고흐가 1881년부터 1885년까지 네덜란드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Anton van Rappard)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다. 화가로서 이제 막 첫 발을 내딛은 청년 고흐가 동료에게 쏟아낸 고민, 열정, 예술적 실험이 한 줄 한 줄에 생생히 살아 있다.
고흐는 이 시기, 미술품 상점 직원·교사·신학도의 길을 모두 접고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한다. 그는 그림이라는 낯선 언어를 배우며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묻는다.
“모든 어려움에도 예술적인 힘과 열정을 꿋꿋이 간직해야 하네.”
고흐의 이 한마디는 예술가의 선언이자, 인간의 다짐처럼 들린다.
이 책은 고흐의 편지 중에서도 드물게 ‘동료 화가’에게 보낸 기록이다. 그의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들이 주로 내면의 고통을 담았다면,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과 열정이 담겨 있다.
그는 편지 속에서 잉크, 크레용, 목탄, 석판화 등 새로운 재료를 탐구하며 느낀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또 ‘민중의 삶’을 그리려는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나는 부유한 자의 얼굴보다 광부의 손, 농부의 흙 묻은 옷자락을 그리고 싶다.”
그의 화풍이 ‘서민의 예술’, ‘고통의 색채’로 불리게 된 배경이 바로 이 편지들 속에서 태동한다. 그가 현실의 고난 속에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예술이야말로 인간을 위로하는 ‘빛’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자신이 존경하던 농부들을 ‘땅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는 그들의 땀과 노동을 화폭에 담으며, ‘삶의 고통 속에서도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증명하려 했다.
책 속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 또한 씨를 뿌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 세계는 이 시기의 ‘씨 뿌리는 사람’, ‘감자 먹는 사람들’ 같은 초기작에서 이미 완성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사회적 인정이나 상류층의 비평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을 찾기 위한 ‘내면의 투쟁’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1880년대 초반, 그는 해부학 책을 펴고 손과 팔의 구조를 스스로 익혔다. 돈이 없어 물감 대신 석탄가루를 섞었고, 초라한 농가의 불빛 아래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럼에도 그는 말했다.
“나는 내가 할 줄 모르는 것을 시도하네. 그게 나의 방법이네.”
이 말은 ‘도전’이라는 단어의 본질을 보여준다. 고흐의 열정은 완벽을 향한 욕심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사랑하는 용기였다.
《반 고흐, 영원한 예술의 시작》은 단순한 예술 서간집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확신을 잃은 모든 이들을 위한 편지집’이다.
라파르트와의 서신을 통해 드러나는 젊은 고흐의 초심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있는가?”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수록된 ‘시들한 우정보다는 결별을’이라는 글은, 고흐가 라파르트와의 우정을 정리하며 자신의 길을 더욱 단단히 붙잡는 순간을 보여준다. 타협하지 않고 예술가로 살아가겠다는 그의 결연한 의지가 독자에게 잔잔한 전율을 준다.
고흐의 편지 속에는 예술의 비극보다 삶의 진실이 있다.
그는 불안하고 외로운 청춘이었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그의 고독은 침묵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대화였다.
위즈덤하우스의 이번 개정판은 고흐의 잘 알려지지 않은 후기 명작들을 재배치하며 시각적 깊이를 더했다. ‘올리브 따는 여인들’, ‘우체부 룰랭의 초상’, ‘프로방스의 농가’ 등은 그의 편지 내용과 함께 놓이며, 글과 그림이 서로의 의미를 완성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 고흐, 영원한 예술의 시작》은 예술가의 기록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우는 모든 사람의 일기다.
고흐의 편지는 여전히 묻는다.
“당신의 빛은 세상을 비추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