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를 시작하며 ― 왜 다시 ‘동이’를 묻는가?
아프리카에서 탄생하여 전세계로 흩어진 인류는 어차피 한 종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에도 피부 색깔, 머리 색깔 등의 약간의 차이 때문에 심한 갈등을 겪어왔고 앞으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나, 여전히 갈등 속에 살아갈 것이다. 요즈음 때아닌 환단고기로 다시 갈등을 겪고 있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중공이 동북공정 등으로 역사왜곡이 심각하여 '분별의 고대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어 이 연재를 기획하여 본다.
이 연재는 고대사를 새롭게 ‘창작’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오래된 기록과 유적, 언어와 지리, 그리고 인류 이동의 흔적을 다시 차분히 읽어 보려는 작업에 가깝다. 오늘날 통설처럼 굳어진 ‘동이는 화하에 동화되었다’는 설명은 과연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는가, 혹은 중원 중심의 후대 서술이 만들어낸 결과는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이 글은 출발한다. 황해를 경계가 아닌 내해로 바라보고 요하와 이땅, 중국 동부 연안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놓으면 동아시아 고대사의 풍경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연재 ①
황해는 경계가 아니라 내해였다
― 인류 이동의 긴 호흡과, ‘북방 남하’가 만들어낸 동아시아의 골격 ―
지도를 펼치면 황해는 언제나 ‘사이’에 놓인다. 한반도와 중국대륙 사이의 바다, 말하자면 경계다. 그런데 고대의 황해는 정말 경계였을까. 오히려 황해는 얕은 수심, 큰 조차, 드넓은 갯벌과 섬들로 이루어진 바다다. 이런 바다는 장벽이 되기보다 길이 되기 좋다. 계절풍이 불고 해류가 움직이면, 사람은 그 흐름을 읽어 항로를 만든다. 그러니 고대의 황해를 “바다”라고만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현대 국가의 시선으로 과거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대의 황해는 ‘외해’가 아니라 ‘내해’였고, 그 내해를 중심으로 요하·요동·산동·이 땅의 서해안은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왔다.
이 연재에서 ‘동이(東夷)’를 다시 묻는 이유도 그 지점에 있다. 오늘날 중공의 대표 포털에서 흔히 보이는 설명, 즉 “동이는 고대 중원이 동쪽의 여러 부족을 부른 이름이고 결국 화하에 동화되었다”는 문장은 얼핏 중립적 요약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한 가지 결론을 미리 깔아 둔다. 중심은 언제나 중원이고, 동쪽은 주변이며, 끝은 흡수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 역사의 결은 그렇게 매끈하지 않다. 동아시아의 형성은 단선이 아니라, 오랜 이동과 합성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인류학과 유전학 모두 인류가 한 가족임을 말한다
이동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곧장 내륙을 가로질렀다고 보기 어렵다. 먹거리와 물을 확보하기 쉬운 길은 대개 해안선이다. 해안은 채집과 어로가 가능하고, 길을 잃지 않으며,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기도 비교적 쉽다. 그러므로 인류의 동진 과정에서 ‘해안 이동’은 자연스러운 전략이 된다. 다만 동남아의 고습 환경, 밀림과 풍토병, 그리고 생존 부담이 높아지는 조건은 일부 집단에게 다른 선택을 강요했을 것이다. 그들은 북쪽으로 올라가 더 건조하고 계절성이 뚜렷한 지대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이동이 길어질수록, 채집보다 사냥의 비중이 커진다.
사냥이 늘어나면 공동체의 언어와 규율이 달라진다. 사냥은 “함께” 해야 하고, 표적·거리·방향·시간의 감각이 중요해진다. 발화는 짧고 명료해지며, 대상과 행위를 분명히 구분하는 구조가 강화된다. 이런 환경은 언어에서 목적어와 서술의 결합, 조사·접사 같은 장치를 발달시키기 쉽다. 즉, 교착어적 문법은 단지 ‘민족의 특성’이 아니라, 오랜 생존 방식과 환경의 흔적일 수 있다. 필자가 늘 강조하는 “북방에서 남하하는 집단”이라는 큰 가설은, 이런 긴 호흡의 인류 이동 위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인류 제3의 요람, 시베리아 그리고 만주
빙하기와 간빙기의 전환은 이 이동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빙하기의 북방은 오늘날처럼 황량한 불모지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형 동물이 살기 좋은 초원 지대가 넓게 펼쳐졌고, 하천과 호수는 생존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온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 빙하가 녹고 강과 호수의 체계가 흔들리며 대홍수가 이어진다. 생태계가 붕괴하면 인간은 ‘그 땅’에 남을 수 없다. 이때의 경험이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 홍수 설화의 층위와도 겹친다. 설화는 과장이 있지만, 그 과장은 종종 집단 기억의 방향을 가리킨다. “물이 모든 것을 덮었다”는 말은 단순한 허구라기보다, 삶의 기반이 순식간에 무너졌던 체험을 담는다.
이런 위기 국면에서 살아남은 집단이 어디로 이동했을까. 높은 산과 안정된 수계는 피난처가 되기 쉽다. 히말라야 북쪽의 고원과 산맥, 그리고 그 주변의 완충지대는 그러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후 기후가 다시 안정되면, 그 인구는 동쪽으로 움직인다. 그 이동의 큰 도착점 중 하나가, 오늘날 내몽골 동부와 요녕성 서북부를 포함하는 요하문명권이다. 요하문명권은 단순히 “중국 문명의 변방”이 아니라, 북방 이동 인류가 만들어낸 복합적인 문화권이었고, 옥기·제의·취락·묘제의 체계가 비교적 일찍 고도화되었다는 인상도 준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분기가 일어난다. 일부는 남으로 내려가 황해 연안과 한국 땅으로 향하고, 일부는 서쪽의 초원 벨트를 따라 다른 세계로 흘러간다. 남하한 집단이 마주친 공간이 바로 황해 내해권이다. 황해가 경계가 아니라 내해였다면, 요하와 한반도 사이의 이동은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 일상’이 된다. 따라서 한반도 서해안과 중국 동부 연안의 고대 유적을 설명할 때, 요하문명권의 남하를 배제하면 오히려 설명이 막힌다. 그 경우 유적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연속을 끊는 순간, 학문은 신비화로 미끄러진다.

만리장성에 갖힌 비논리적 중화와 화하족
이런 큰 구조 위에, 우리가 흔히 ‘중국 문명’이라고 부르는 중원 중심의 국가 체계가 형성된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중원은 과연 언제나 발원지였을까. 아니면 여러 방향에서 유입된 기술과 인구, 제의와 규범이 수렴되어 ‘국가’로 제도화되는 공간이었을까.
자료를 읽다 보면 후자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대목이 적지 않다. 청동기 문화의 흐름을 두고서도, 현재까지 확인된 범위에서는 북방·요하 계통과의 연속성이 자주 논의되며, 중원에서 완전한 자생의 단계를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증거가 없다”는 말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의 판에서는 ‘중원 단독 발명 → 주변 확산’이라는 단선 도식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왕조사의 장면을 보아도 비슷한 질문이 따라온다. 秦의 嬴씨가 어디서 왔는지, 漢의 劉邦이 어떤 지역적 기반 위에서 성장했는지, 그리고 隋·唐·遼·金·元·淸으로 이어지는 정권의 계통이 북방 이동 집단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는지, 이 논점들은 오래전부터 논쟁되어 왔다. 여기서 원장님께서 제시하신 주장은 한 방향의 가설을 제공한다. 곧, “중원 왕조사에서 반복되는 강력한 국가 형성의 동력은 종종 북방·동방 이동 집단에서 왔다”는 관찰이다. 이 관찰이 사실이라면, “동이는 화하에 동화되어 사라졌다”는 문장은 자연스러운 결론이 아니라, 결과를 거꾸로 원인으로 삼은 서술일 가능성이 커진다.
동이는 스스로 동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그러면 ‘동이’는 무엇이었나. 최소한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동이는 고정된 단일 민족명이 아니라, 황해 내해권을 공유한 여러 집단을 중원 국가가 방위 개념으로 묶어 부른 총칭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총칭은 시간이 흐르며 더 세분화된 이름들로 분해되었을 것이다. 동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름이 바뀌고, 제국의 내부로 들어가며, 기록의 구조 속에서 재배치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연재의 첫 회는 ‘결론’을 내리기보다, 독자에게 한 가지 렌즈를 건넨다. 황해를 내해로 보는 렌즈, 요하와 한반도를 단절이 아니라 연속으로 보는 렌즈, 그리고 동아시아의 국가 형성을 이동과 합성의 결과로 보는 렌즈다. 이 렌즈를 쓰는 순간, 익숙한 문장들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그 낯섦에서 역사 연구는 출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