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반복 발생하는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PAI)에 대해, 단순 가축전염병이 아닌 자연재해에 준하는 위기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살처분 이후 장기간 이어지는 경영 공백이 현행 보상 체계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 개선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현재 국내 고병원성 AI 대응은 「가축전염병예방법」에 근거해 운영되고 있다. 발생 농가에는 살처분 조치와 함께 살처분 시점의 가축 평가액을 기준으로 한 보상이 이뤄진다. 산란계의 경우 월령과 사육 단계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통상 1수당 일정 수준의 평가액이 적용된다. 다만 보상 범위는 살처분 시점을 기준으로 종료되며, 이후 재입식이 허용되기까지 발생하는 경영 손실은 별도의 지원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현장에 따르면 재입식 제한 기간은 통상 6개월에서 10개월가량 소요된다. 이 기간 동안 계란 생산이 중단되지만, 최소 인력 유지와 축사·설비 관리, 방역 유지 비용 등 고정비는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충청권에서 산란계 농장을 운영하는 한 농가는 “살처분 이후 재입식 전까지 생산이 전면 중단됐지만, 인건비와 시설 관리 비용은 계속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경기 지역의 또 다른 산란계 농가 역시 “방역 지침에 따라 모든 절차를 이행했지만, 이후 경영 공백에 대한 제도적 지원은 연결되지 않았다”며 “재입식 전까지는 농가가 자체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구조였다”고 전했다.
농가들은 고병원성 AI 발생 시 실제 피해 규모가 살처분 보상금보다 훨씬 크다고 설명한다. 살처분으로 인한 가축 손실뿐 아니라, 재입식 제한 기간 동안의 매출 중단, 인건비, 시설 유지·관리 비용, 방역·소독 유지 비용, 재입식 준비 비용 등이 수개월간 누적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농가당 피해 규모는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해외 사례를 보면 고병원성 AI를 재난 관점에서 접근하는 제도도 운영되고 있다. 일본은 가축 방역 관련 법과 자연재해 대응 제도를 연계 적용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미국 역시 농무부 비상대응 프로그램을 통해 살처분과 방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처리 비용까지 지원 범위에 포함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고병원성 AI가 전염병으로만 규정돼 있어, 살처분 이후 단계에 대한 제도적 대응은 제한적인 상황이다. 재난 관련 법과의 연계 적용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재입식 전까지의 경영 손실은 농가가 개별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현장에서는 고병원성 AI의 발생 특성과 피해 양상을 고려할 때 재난에 준하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한 산란계 농가는 “발생 시점과 관계없이 반복 피해가 발생하고, 농가의 노력과 무관하게 생산 기반이 중단되는 점에서 재난에 가깝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병원성 AI를 재난 관점에서 인식할 경우 제도적 선택폭이 확대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자연재해 관련 제도 검토, 방역 처리 비용과 고정비를 포함한 보상 범위 논의, 재입식 및 경영 정상화 단계까지 고려한 지원 체계 마련 등이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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