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카고 남서부 필센 지역은 오랫동안 노동계층과 이민자 공동체가 삶의 터전을 이뤄온 곳이다. 드보락 공원 인근 산업지대 한복판에는 1960년대에 건설된 석유 연소 발전시설이 여전히 서 있다. 한때 철거 수순을 밟을 예정이던 이 발전소가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인공지능 확산이 촉발한 전력 수요 급증 때문이다.
휴스턴에 본사를 둔 NRG Energy가 소유한 이 시설은 원래 가동 빈도가 매우 낮은 피커 발전소였다. 피커는 전력 사용이 급증하는 순간에만 짧게 가동돼 정전을 막는 역할을 맡는다. 효율보다는 속도에 초점을 맞춰 설계된 탓에 운영 비용이 높고 오염물질 배출량도 많다. 이 때문에 다수의 피커 발전소는 단계적 폐쇄 대상으로 분류돼 왔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했다. 미국 최대 전력 시장 중 하나인 PJM Interconnection에서 데이터센터 수요가 기존 공급 능력을 넘어섰고, 전력 확보를 위한 가격이 급등했다. 그 결과 수익성이 낮다고 여겨졌던 노후 발전소들이 다시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NRG는 필센 발전소의 퇴출 계획을 철회하며 “현 시점에서는 가동을 유지할 실질적 이유가 있다”고 밝혔다.
피커 발전소는 미국 전역에서 다시 호출되고 있다. 로이터 분석에 따르면 PJM 관할 지역에서 은퇴 예정이던 석유·가스·석탄 발전소의 약 60퍼센트가 올해 들어 폐쇄를 연기하거나 취소했다. 이 중 다수가 피커 설비였다. 미국 전체 전력 생산에서 피커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3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이론상 최대 19퍼센트까지 공급이 가능하다는 점이 위기 상황에서 매력적인 대안으로 떠올랐다.
문제는 환경 부담이다. 피커 발전소는 대부분 수십 년 전에 건설돼 황산화물과 미세입자, 수은을 줄이기 위한 최신 저감 장치를 갖추지 못했다. 굴뚝 높이도 낮아 오염물질이 인근 주거지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필센 부지에서는 석탄 발전이 중단된 이후 대기질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연간 수 톤에서 수십 톤에 이르는 이산화황이 배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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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시설의 입지는 사회적 불균형과도 맞닿아 있다. 학계와 연방정부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약 1천 개 피커 발전소는 저소득층과 유색인종 거주 지역에 집중돼 있다. 과거 금융 차별을 겪은 지역일수록 피커 설비가 인근에 들어설 가능성이 높았다는 분석도 있다. 전력 수요 증가로 이들 설비의 수명이 연장될 경우, 환경 부담 역시 동일한 지역에 반복적으로 전가될 우려가 크다.
전력망 압박의 배경에는 구조적 변화가 있다. 가전 보급과 산업화가 가속되던 20세기 중반, 그리고 정보기술이 확산된 2000년 전후에 다수의 피커 발전소가 건설됐다. 이후 효율 개선과 재생에너지 확대로 전력 수요 증가세는 둔화됐으나, 최근 인공지능과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새로운 변수가 됐다. 태양광과 풍력은 확대되고 있지만, 간헐성이라는 한계로 즉각적인 대응에는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연방정부 역시 현실적인 대응을 강조하고 있다. 기존 발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단기간의 공급 공백을 메우겠다는 입장이다. 에너지 당국은 전력망에 남아 있는 여유 용량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반면 전문가들은 송전망 확충과 에너지 저장 기술 투자가 병행되지 않으면 피커 의존이 장기화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NRG는 피커 발전소가 전력망의 ‘최후 방어선’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극한 폭염이나 한파, 외부 전력 차단 상황에서 도심 내 자체 발전 설비는 안정성을 높인다는 논리다. 회사 측은 관련 시설이 연방 및 주 환경 규제를 준수하며 운영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지역 주민들의 우려는 가시지 않는다. 필센은 이미 산업 교통, 금속 처리 시설, 대형 도로에서 발생하는 오염에 노출돼 있다. 여기에 노후 발전소의 가동 빈도가 늘어날 경우 누적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 산업의 성장 이면에서 전력과 환경 비용을 누가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