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겨울밤, 지구촌의 촛불과 고요한 시선들에 대하여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를 지나, 세상이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미묘한 시간의 틈새가 찾아온다. 크리스마스 이브다. 거리마다 넘쳐나는 화려한 루미나리에와 상점가의 들뜬 캐럴 소리 너머, 인류의 영혼 깊은 곳을 건드리는 어떤 떨림이 공기 중에 감도는 밤이다. 오늘 밤, 이 거대한 지구촌이 이 특별한 밤을 어떻게 맞이하고 보내는지, 그 내밀한 풍경들을 함께 들여다본다.
도대체 크리스마스가 무엇이기에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토록 온 세상이 들썩이는 것일까. 그 시작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비현실적인 마구간이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 우주의 주인이 가장 낮고 연약한 핏덩이 아기의 모습으로, 그것도 짐승의 여물통 위에 누웠다는 이 지독한 역설. 이것이 성탄의 핵심이다.
인간이 신을 찾아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아 올릴 때, 오히려 신이 인간의 비참한 현실 한복판으로, 저 낮은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온 사건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본질적으로 '낮아짐'의 신비이며,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비로소 비친 한 줄기 빛에 대한 이야기다.
이 빛을 기억하기 위해 오늘 밤, 전 세계의 교회는 각자의 언어와 문화로 깨어 있다.
유럽의 오래된 돌 성당들에서는 지금 이 시각, 장엄한 촛불 예배(Candlelight Service)가 한창이다. 수백 년 묵은 파이프 오르간의 낮은 울림이 공기를 진동시키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달빛 아래 사람들이 모여든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라틴어로, 영어로, 독일어로 나직이 울려 퍼질 때, 사람들은 옆 사람의 초에서 나의 초로 불을 옮겨 붙인다. 하나둘 밝혀진 작은 불꽃들이 거대한 성당을 가득 메우는 순간, 그들은 2천 년 전 베들레헴의 어둠을 밝혔던 그 원초적인 빛을 감각적으로 체험한다. 그 순간만큼은 전쟁의 소문도, 경제적 위기도 잠시 멈춘다.
시선을 돌려 남반구로 가보자.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맞는 호주나 남아공의 해변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반팔과 반바지 차림의 사람들이 해변에 모여 앉아 바비큐를 즐기고, 해가 지면 모래사장에 앉아 촛불을 들고 파도 소리와 함께 캐럴을 부른다. '해변의 캐럴(Carols by the Sea)'이다. 그들에게 성탄 전야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맞는 시원한 영혼의 축제와도 같다.
그러나, 화려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구 어딘가,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그늘진 땅에서는 오늘 밤이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절절한 밤이 된다.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가리고, 숨죽여 모여든다. 그들은 소리 내어 찬양하지 못한다. 그저 입 모양으로, 속삭임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서로의 눈물을 닦아준다. 그들에게 이브의 밤은 낭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실체적인 희망을 붙잡는 생존의 현장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지구적 축제의 밤에 우리의 이웃인 18억의 무슬림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종교 간의 미묘하고도 흥미로운 교차점을 마주하게 된다.
무슬림들에게 예수, 즉, 그들이 부르는 '이싸(Isa)'는 신의 아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꾸란에 여러 번 언급되는, 알라가 보낸 매우 중요하고 존경받는 대예언자 중 한 명이다. 심지어 마리아(Maryam)는 꾸란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여성이며, 그녀의 동정녀 탄생 또한 믿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들에게 오늘 밤은 '신이 인간이 된 날'이 아니다. 그렇기에 무슬림들에게 크리스마스 이브는 종교적 의미가 없는, 그저 평범한 겨울밤일 뿐이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오늘 밤에도 상점들이 평소처럼 문을 열고, 사람들은 일상을 영위한다.
하지만, 디아스포라의 세계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서구 사회나 기독교 문화권에 섞여 살아가는 무슬림들은 이 거대한 문화적 파도를 유연하게 마주한다. 어떤 이들은 종교적 의미는 배제한 채, 거리의 화려한 불빛과 연말의 들뜬 분위기를 이웃과 함께 즐기기도 한다.
또 어떤 무슬림 가정은 기독교인 이웃이 건넨 쿠키를 기쁘게 받으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를 건넨다. 개중에는 이 시기를 기회 삼아 기독교인 친구들에게 이슬람에서 바라보는 예수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하려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성탄절 이브는 '너희의 명절'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풍경'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오늘 밤, 지구촌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수억 개의 촛불과 그 촛불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은 하나의 지점을 향한다. 그것은 바로 '평화'에 대한 갈망이다.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무릎 꿇는 이에게나, 그를 예언자로 존경하며 바라보는 이에게나, 혹은,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이 밤의 분위기에 취해있는 이에게나, 오늘 밤은 잠시 멈춤의 시간이다.
차가운 마구간에서 시작된 그 작고 연약한 생명의 이야기가, 수천 년의 시공간을 넘어 오늘 나의 방과 당신의 가슴에까지 닿았다. 이 밤, 지구 반대편 누군가가 밝힌 촛불의 온기가 당신에게도 전해지기를. 분주함을 내려놓고 잠시 고요 속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했던 그 사랑의 신비를 묵상해 보기를 권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