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이 인간의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까?
한때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성장했다. 낯선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고, 실패하며 배우는 과정 속에서 ‘삶의 질감’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다르다.
인공지능이 문서를 대신 요약하고, 비대면 플랫폼이 만남을 대체하며, SNS가 우리의 하루를 실시간으로 기록한다. 디지털이 현실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하는 시대, 크리스틴 로젠은 이 변화를 “경험의 멸종”이라 부른다.
《경험의 멸종》(어크로스, 2025)은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경험을 어떻게 잠식하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철학적 비평서다. 저자는 묻는다. “기술로 매개된 경험이 인간의 직접 경험을 대체할 때,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로젠이 지적하는 ‘매끄러움(smoothness)’은 현대 기술 문명의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속성이다.
디지털 플랫폼은 불편함과 마찰을 제거한다. 클릭 한 번으로 연결되고, 인공지능은 우리의 실패를 대신 계산한다. 하지만 그 ‘편리함’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덜 인간다워진다.
저자는 기술이 제공하는 매끄러운 경험이 인간의 불완전함을 제거하면서 결국 인간성을 제거한다고 경고한다.
“애플은 ‘자동적이고 수월하며 매끄러운’ 세계를 약속하지만, 그곳은 더 이상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다.”
로젠의 문장은 마치 기술 문명 속에서 점점 투명해지는 인간의 초상을 비추는 거울 같다.
책의 3장은 특히 인상적이다. ‘손으로 쓰고 그리기’라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저자는 경험의 본질을 탐색한다.
AI가 글을 대신 써주고, 이미지 생성기가 명령어 하나로 그림을 만들어주는 시대에 우리는 ‘생각하는 과정’을 잃어가고 있다.
손으로 쓴다는 것은 느리게 생각하고, 감각으로 사고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의 인간은 입력(input)만 하고 결과(output)를 기다리는 존재가 되었다.
로젠은 “기기가 대신 요약해준 글은 독서의 종말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문서는 사고의 종말을, 명령어로 만든 그림은 창작의 종말을 부른다”고 단언한다.
즉, 기술은 인간의 사고를 단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삭제하고 있다.
로젠은 경험의 소멸이 감정의 소멸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비대면 시대의 인간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감정은 표정이 아닌 이모티콘으로 전달된다. 기술이 감정을 매개하면서 인간의 내면은 점점 납작해지고, ‘감정의 근육’은 퇴화한다.
그 결과,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인내심이 약하고, 지루함을 참지 못하며, 즉각적인 자극만을 원한다.
로젠은 이를 “감정 길들이기(Education of Emotion)의 실패”라고 부른다.
감정을 느끼고, 다스리고, 공감하는 능력은 인간의 핵심적 경험이다. 그러나 그 감각조차도 기술이 대신해주는 사회에서, 인간은 점점 ‘감정의 기계’로 전락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로젠은 절망 대신 저항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경험의 멸종은 불가피한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라고 말한다.
기술의 발전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인간을 대신하도록 허락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는 공동체의 회복을 제안한다. ‘우리’라는 감각, 즉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은 개인을 편리하게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를 해체한다. 따라서 ‘경험의 회복’은 곧 ‘공동체의 회복’과 맞닿아 있다.
이 책은 단순히 기술 비판서가 아니라, 인간을 되찾기 위한 선언문에 가깝다.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려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경험을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경험의 멸종》은 인공지능, 빅데이터, 알고리즘으로 대표되는 기술문명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던진다.
로젠은 묻는다. “기술이 대신 살아주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 책은 단순히 비판이 아니라 선택의 요청이다.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기술에게 ‘사용당하는 인간’이 될 것인가.
로젠의 대답은 분명하다. “경험하라. 그 불편함 속에 인간이 있다.”
디지털의 매끄러운 유토피아 속에서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지금, 이 책은 우리에게 다시금 ‘삶을 직접 살아보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기술의 시대를 건너는 유일한 인간의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