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이 된다는 것, 그건 결국 스스로 살아보려 애쓰는 일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소설 『순례 주택』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동화와 청소년 문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유은실 월드’라 불리는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해온 작가 유은실이, 이번에는 ‘망한 가족’과 ‘괴짜 할머니’를 통해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만국기 소년』 등으로 따뜻한 현실 감각을 보여줬던 그가 3년 만에 선보인 신작 『순례 주택』(비룡소, 2023)은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단짠단짠 성장 서사이자, 시대를 향한 뼈 있는 풍자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16세 소녀 ‘수림’과 75세 건물주 ‘김순례’ 씨다. 쫄딱 망한 수림이네 가족은 외할아버지의 옛 여자친구가 운영하는 빌라 ‘순례 주택’으로 이사를 오면서 기이한 동거를 시작한다. 세신사로 평생을 일군 순례 씨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을 훈련시키듯 돌본다. 그의 빌라에서 수림이 가족은 ‘진짜 어른’으로 성장하는 연습을 시작한다.
유은실의 작품은 언제나 유머러스하다. 하지만 그 웃음은 현실의 골짜기를 정확히 짚는 데서 나온다.
『순례 주택』은 ‘빌라촌’과 ‘아파트 단지’로 나뉜 세상을 보여준다. “빌라촌 애들과 어울리는 게 걱정된다”는 대사는 단지 허구의 대사가 아니라, 오늘날의 불편한 진실이다. 순례 주택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실패를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다시 살아보려는 사람들’이다.
유은실은 이런 인물들을 통해 어른 사회의 위선을 드러낸다.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깍듯하지만, 속으로는 남을 깔보는 부모 세대. 자본과 학벌로만 사람을 평가하면서도 독립하지 못한 ‘가짜 어른들’. 작가는 이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한다. “당신들은 정말 어른인가요?”
그 웃음 뒤에는 냉철한 자화상이 있다.
작품의 제목이자 핵심 키워드는 ‘순례’다.
순례(巡禮)는 단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인생의 태도다. 순례 씨는 자신의 이름을 ‘온순한 예절의 순례(順禮)’에서 ‘세상을 걷는 순례자(巡禮)’로 바꿨다. 인생을 ‘지구별 여행’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순례 씨의 삶은 유쾌하면서도 성찰적이다. 그는 이산화탄소, 쓰레기, 돈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감각함’이라고 말한다.
수림이는 그에게서 배운다. 세상은 요란하고 불공평하지만, 그래도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는 노력’만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줄자처럼 팽팽히 당겨졌다가 탁 풀리는 인생의 순간마다, 수림이는 조금씩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
소설 속 줄자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모든 것을 재고 따지는 사회 속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살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의 은유다. 순례 씨가 아끼던 그 줄자는 결국 수림이에게로 넘어간다. 세대를 이어주는 삶의 ‘척도’다.
『순례 주택』은 청소년소설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성인을 위한 성장소설’에 가깝다.
작가는 이번에도 독특한 캐릭터, 생활감 넘치는 대화, 그리고 촌철살인의 메시지를 통해 독자를 단숨에 끌어당긴다.
그의 문장은 짧고 명료하지만, 그 안에 깊은 상처와 따뜻한 위로가 공존한다.
수림이와 순례 씨의 관계는 단순한 ‘세대 간 우정’이 아니다.
혈연의 울타리 없이도 서로의 삶을 이어주는,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요즘 시대의 외로움과 단절에 대한 대답처럼 읽힌다.
유은실은 말한다.
“순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 인생의 관광객은 되고 싶지 않다.”
이 한 줄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어른들의 고백처럼 들린다.
『순례 주택』은 요란한 교훈이나 눈물겨운 감정선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소박한 밥상, 낡은 빌라, 줄자 한 자락 속에서 인생의 진실을 꺼내 보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 많이 소유하거나 강해지는 일이 아니라, 조금 더 솔직하고, 조금 더 단단하게 살아보려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나도 순례자가 되고 싶다.
누군가의 삶에 알베르게(순례길의 쉼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바로 그런 책이다.
지친 어른들에게, ‘다시 살아보자’는 다정한 초대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