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 마이클 샌델 강의
작은 것들의 신 두 번째 이야기
‘작은 것들의 신’ 두 번째 이야기로, 지난 회 친영주의에 이어 불가촉천민 벨루타(Velutha)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Untouchable’은 인도에서는 접촉해서는 안 되는 신분 계급 중 하나이다. ‘touch’가 만지다로 흔히 해석해서 보통 ‘untouchable’은 ‘만질 수 없는’이 일반적 뜻이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만져서 안되는 느낌이 강하다.
벨루타는 본인이 사는 지역 언어인 말라야람(Malayalam)어로 하얀색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 본인은 까만색에 가까운 피부로 모순적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작은 것들의 신’을 읽으며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이 어떤 정도의 대우를 받는지 정말 잘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이 든 게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의 여러 가지 구절이었다. ‘공정하다는 착각’의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이다. 직역하면 혜택이나 공적의 독재 그리고 부재는 무엇이 공익이 되는가 정도이다.
벨루타는 남다른 손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 주변의 사물을 이용하여 자잘한 것을 만들어서 시리아 정교회 주인에게 바치기도 했다. 바칠 때도 접촉하지 않고 물건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그의 운명은 타고 났다. 가촉민들과 접촉해서도 안되고 자신의 흔적을 남겨서도 안 된다.
독일인 목수 장인을 만나 제대로 배워서 그의 실력은 나아졌다. 또 운 좋게 학교에 다녀서 글을 읽을 수 있다. 운이 좋다는 것은 그의 형과 아버지는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외지에서 공부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시리아 정교회 주인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해준다.
책을 읽어나가며, 특히 마지막으로 갈수록 벨루타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어땠느냐는 질문이 든다. 그는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 틀 지어진 운명에서 살아간다. 그 재주에 비해 돈도 많이 벌지 못하는 데다가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 꿈도 꾸지 못한다.
몇 년 전 ‘미라클 모닝’이라든지 아침에 일어나면 부자로 성공할 것 같은 게 유행한 적 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모두가 성공했다면 새벽부터 일을 나가는 많은 직군의 분들도 그래야 한다.
고 노회찬 의원이 6411번 버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가 도시에서 이용하는 많은 빌딩이 깨끗한 이유는 그 새벽에 첫차를 타고 출근해서 일하는 분들 덕이다. 새벽 네 시반 쯤에 운행하는 첫차는 사람으로 만원이라고 한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을 도와주는 분들이 새벽부터 출근한다. 그 분들은 서민에 가깝지 부자에 가깝지는 않다.
벨루타는 주인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차코는 공장 운영이 어려워져서 직원에게 월급을 제대로 못 줘도 자기 취미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다. 근면의 측면에서 보면 차코보다 벨루타가 보상을 더 받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차코는 좋은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혜택을 많이 받는다. 여동생 암무는 여자라 교육도 받지 못하고, 어머니 공장에서 열심히 일해도 공장에 대해 소유권이 전혀 없다. 차코는 좋은 환경 덕에 영국 유학까지 가서 공부하고, 영국 여인과 결혼해 가정을 잠시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인도로 돌아와 괜찮은 직업을 가진다. 그러나 그 좋은 직업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버려 버린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았다는 것에서 차코를 동정할 수 있다. 하지만, 차코가 그렇게 고등 교육을 받고 좋은 직업을 가진 것은 그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전부 자기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 벨루타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벨루타의 삶이 어떻게 됐을지도 생각해 보는 게 민주주의에 사는 사람들의 자세가 아닐지 싶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평등 사회이다. 나와 너는 각각 한 표를 행사할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살기에 대표자는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독재자처럼 군림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벨루타의 아버지는 옛날 사람이라 변화하는 시대를 알지 못한다. 자식보다 오래된 카스트 계급이 중요하다. 그런 가정에 태어난 것도 벨루타는 운이 없을 수도 있다. 자식을 적에게 던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효자동 이발사’에서 아들을 사지로 모는 아버지를 보며 분노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현대 사회에도 자식보다 자신의 체면이나 사회적 틀이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식을 낳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가족은 서로 조건 없이 사랑하며, 세상풍파의 보루로 본다. 세상이 아무리 이익에 따라 움직여도 가정만은 이유 없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가정으로 도피할 수 있다. 그게 잘 안되면 개인이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에 놓이기 쉽다고 한다.
벨루타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사는데, 가족조차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적에게 넘긴 게 그의 아버지다. 그 대목이 가슴이 너무 아팠다. 지나친 생각일 수 있지만, 벨루타 아버지는 절대로 자기가 뭔 짓을 했는지 평생 모를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