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의 최전선에서 신과 대화하다
– 다그 함마르셸드가 남긴 ‘리더의 내면’에 대한 기록 –
유엔 사무총장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다그 함마르셸드(Dag Hammarskjöld) 는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냉전의 긴장 속에서 국제 분쟁의 중재자로 활약했던 그는 외교의 최전선에서 늘 ‘균형’과 ‘평화’라는 단어를 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발견된 한 권의 원고, 『이정표』는 세계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함마르셸드를 드러낸다.
이 책은 그가 20대 중반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쓴 일기이자, 자기 성찰의 기록이다. 외교관의 냉철함과는 달리, 그 안에는 깊은 고독, 신 앞에서의 떨림, 그리고 ‘소명’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이 담겨 있다. 그는 이 기록을 “나 자신과의, 그리고 신과 나 사이의 협상에 관한 백서”라 부르며, 외적인 권력의 무게 속에서도 내면의 진실을 잃지 않으려 했다.
1961년 9월, 콩고 내전 사태의 중재를 위해 현장으로 향하던 함마르셸드의 비행기가 잠비아 은돌라 인근에서 추락했다. 사고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을 넘어 한 시대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의 유고 중 뉴욕 자택에서 발견된 원고가 바로 『이정표』다.
그가 일기 속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단순한 신앙인의 고백이 아니다. 이 책의 문장들은 시이자 기도이며, 결단의 흔적이다. 1925년의 시로 시작해 1961년 세상을 떠나기 전의 짧은 단상으로 끝나는 이 기록은 한 인간이 “죽음에 다가서며 완성해 간 영혼의 언어”라 할 만하다.
그의 글은 자신이 마주한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그 속에서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소명’을 향한 결연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가장 긴 여행은 내면으로 향하는 여행이다”라며, 인간의 삶이 결국 자신 안으로 돌아가는 순례임을 보여준다.
『이정표』는 전통적인 일기 형식이 아니다.
짧은 시, 기도, 격언이 뒤섞인 단상집에 가깝다. 하지만 그 속에는 놀라울 만큼 일관된 사유의 흐름이 있다. ‘자유’, ‘책임’, ‘침묵’, ‘봉사’, ‘소명’ 같은 단어들이 그의 세계를 지배한다. 그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국제 정치의 현실을 다루는 동시에, 내면의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다스렸다.
이 책은 영성서이면서 동시에 리더십의 교본이다.
오늘날 리더들이 ‘성과’와 ‘효율’로 자신을 증명하려 할 때, 함마르셸드는 오히려 ‘침묵’과 ‘진실성’을 통해 자신을 지키려 했다. 그는 “진정한 힘은 침묵 속에서 나온다”고 썼고, “책임은 명예가 아니라 고통의 다른 이름”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문장은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공적인 삶과 사적인 영혼의 균형’이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이정표』는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오늘날처럼 정치, 기업, 사회 전반이 불안정하고 분열된 시대일수록, 이 책은 더 큰 울림을 준다. 함마르셸드는 외부의 혼란 속에서도 “내면의 질서”를 지키려 했다.
그가 남긴 문장 하나하나는 리더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인간의 자유는 자기 한계의 인식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타인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고, 진정한 리더십이 싹튼다. 『이정표』는 그 여정을 증언하는 책이다.
국내 최초로 스웨덴어 원문 완역본으로 출간된 이번 판(복있는사람, 2025)은 그동안 영어판으로만 읽히던 문장의 깊이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한다. 단순한 일기가 아닌, 인간과 신, 개인과 세계 사이의 대화를 담은 이 책은 현대인의 내면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는 고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정표』는 시대를 초월한 영적·지적 고전이다.
다그 함마르셸드가 남긴 문장들은 단지 과거의 리더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
그는 자신의 죽음 직전까지 ‘신 앞에서의 투명한 인간’을 꿈꾸었고, 그 꿈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지표로 남아 있다.
정치의 중심에서 신과 대화한 한 인간의 기록, 『이정표』는 지금도 묻는다.
“당신의 길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