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의 토종 밀, 세계 식량 혁명의 씨앗이 되다
한반도의 들녘에서 자라던 키 작은 밀이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그 이름은 ‘앉은뱅이 밀’-한국 고유의 토종 품종이다. 한때 키가 작고 왜소하다는 이유로 농가의 외면을 받았던 이 밀은 20세기 중반, 인류의 대기근을 막은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의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앉은뱅이 밀은 기원전부터 한반도에서 재배되어 온 밀로, 줄기 높이가 50~80cm로 짧고 쓰러짐에 강하며,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란다. 수확량이 높고 병충해에 강한 특성 덕분에, 한반도의 기후에 맞춰 수천 년 동안 자연의 선택을 받아왔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값싼 수입 밀의 유입과 함께 이 품종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바로 이 ‘작은 밀’이 훗날 전 세계 수억 명의 굶주림을 구할 씨앗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일제 강점기, 앉은뱅이 밀이 일본 농림 10호로 바뀌던 날
앉은뱅이 밀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의 농업 자원을 조사·수탈하는 과정에서 이 밀의 우수성을 발견했다. 짧은 줄기 덕분에 쓰러짐이 적고, 수확량이 많으며,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점이 일본 농학자들의 눈에 띄었다. 일본은 1935년 이 품종을 개량하여 ‘농림 10호’로 등록했다.
그 후 한반도에서 태어난 이 종자는 일본 농업 연구소의 보관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조선의 농부가 길러낸 밀은 식민지 수탈의 산물로 남지 않고, 세계 식량위기의 해결사로 다시 태어나는 기적의 여정을 시작했다.

노먼 볼로그 박사와의 만남-멕시코에서 피어난 기적의 밀 ‘소노라64’
1950년대, 멕시코의 젊은 농학자 노먼 볼로그(Norman Borlaug) 박사는 극심한 기근과 식량난에 시달리던 중 농림 10호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이 품종을 멕시코 토종밀과 교배하여 병충해에 강하고 쓰러지지 않는 밀, ‘소노라 64’를 개발했다. 그 결과는 인류사에 기록될 기적이었다.
인도의 밀 생산량은 단 5년 만에 60% 이상 증가했고, 파키스탄·필리핀 등 개발도상국으로 퍼지며 수억 명을 굶주림에서 구해냈다. 이 성과로 볼로그 박사는 197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업적 뒤에는, 경남 진주의 들판에서 자라던 작은 밀이 있었다. 그 이름조차 잊힌 앉은뱅이 밀이 인류의 미래를 바꿔놓은 것이다.
사라져가는 고향의 곡물, 지속 가능한 농업의 미래로 되살아나다
그러나 정작 고향인 한국에서 앉은뱅이 밀의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1980년대 수매 제도 폐지와 수입 개방으로 농가가 몰락하면서 토종 밀 재배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현재 이 품종은 경남 진주시 금곡면에서 소수의 농민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연간 생산량은 약 120톤에 불과하지만, 광고 한 줄 없이도 전량이 직거래로 팔릴 만큼 품질이 높다.
앉은뱅이 밀은 글루텐 함량이 낮아 소화가 잘되고, 단백질과 무기질이 풍부해 건강식으로도 주목받는다. 무엇보다 수천 년간 한반도 기후에 적응해온 기후 위기 대응형 작물로서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기후변화와 식량안보 위기가 겹친 오늘, 척박한 땅에도 강하고 잘 쓰러지지 않는 앉은뱅이 밀은 단순한 옛 품종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농업의 미래를 여는 열쇠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한 알의 밀, 인류의 역사를 바꾸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반도의 토종 밀은 일제의 수탈과 세계 전쟁을 거치며 인류의 굶주림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경남 진주의 농민들은 보잘것 없는 품종이라 외면하는, 인류를 구한 씨앗을 묵묵히 일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