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편집자주)
이 칼럼은 법학박사로서 노동법을 전공한 박동명 한국정책연구원장의 전문적 시각을 바탕으로, 산업재해의 법적 책임 구조와 예방 시스템의 개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 글이다.
박 원장은 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과 국회의정연수원 강사를 역임한 공공정책 전문가로서, “형식적 안전관리에서 실질적 생명보호로의 전환”을 강조하며, 산업안전정책이 법과 제도의 틀을 넘어 생명존중의 사회 가치로 자리 잡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Ⅰ. 반복되는 비극, ‘안전 불감 사회’의 민낯
또다시 산업현장에서 노동자의 목숨이 스러졌다. 울산의 한 화력발전소 해체 공사 중 노후 보일러 타워가 붕괴해 다수의 근로자가 사망한 사건은, 한국 사회의 산업안전 관리체계가 여전히 구조적 결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매년 수백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안전불감증”이라는 진단이 되풀이되지만, 실질적 변화는 미미하다.
2025년 상반기 기준 산업재해 사고사망자는 287명이며, 그중 48%가 건설업에서 발생하였다. 이는 OECD 평균 대비 2배 이상 높은 수치로, 세계 10위권 경제규모를 가진 국가로서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공공사업에서조차 원청-하청-재하청의 다단계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고, 안전보다 공정단축과 원가절감이 우선되는 산업구조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Ⅱ. 근본적 원인: 제도적 사각지대와 책임 회피의 구조
산업재해의 근본적인 원인은 ‘책임의 분산과 회피’이다. 원청은 하청으로, 하청은 재하청으로 책임을 떠넘기며, 공공기관조차 발주만 했다는 이유로 실질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특히 ‘공작물’로 분류되어 건축물관리법상 해체 허가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는 제도적 허점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법학박사로서 노동법을 전공한 필자는, 이러한 구조가 단순한 현장관리 실패가 아니라 ‘노동법적 책임의 단절 구조’임을 지적한다. 즉, 계약상 관계는 존재하지만, 법적·행정적 책임은 공백 상태로 남는 것이다. 원청과 발주기관의 안전관리 의무를 실질화하지 않는 한, 산업재해의 고리는 끊어질 수 없다.
Ⅲ. 선진국의 산업안전 시스템: ‘참여와 예방 중심’의 구조
1. 영국: 기업 전체를 처벌하는 구조적 책임제
영국은 2008년 세계 최초로 「기업과실치사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을 제정하여, 기업조직 전체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사고 발생 시 단순히 현장관리자나 하청업체가 아니라, ‘지휘라인 전체’의 책임을 묻는다. 또한 산업안전보건청(HSE)이 모든 사고 데이터를 공개해 국민적 감시를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산업재해 사망률은 10만 명당 0.8명으로 OECD 최저 수준이다.
2. 독일: 노사 공동 예방시스템
독일의 산재보험조합(BG)은 단순 보상기구가 아니라, 기업과 근로자가 함께 위험요소를 사전에 관리하는 예방 중심의 감독체계이다. 노사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산재예방위원회’를 설치하고, 위험작업 사전평가와 승인 절차를 의무화했다. 그 결과 사망률은 10만 명당 0.7명에 불과하다.
3. 스웨덴: 노동자 주도 안전체계
스웨덴의 「작업환경법(Arbetsmiljölagen)」은 현장 노동자에게 ‘작업중지권’을 부여한다. 즉, 위험을 감지하면 즉시 작업을 중단할 수 있다. 현장 안전대표 제도와 지방정부의 ‘작업환경청’이 주기적으로 점검하며, 예방 중심의 안전문화가 제도적으로 뿌리내렸다.
4. 일본: 기술혁신과 경영평가 연계
일본은 ‘제로재해운동(ゼロ災運動)’을 통해 산업안전을 기업경영의 주요 성과지표로 반영하고 있다. 첨단 자동화 설비, 로봇, 드론 등을 활용해 위험작업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기술혁신형 접근을 택했다.
Ⅳ. 한국형 대책: 형식에서 실질로의 전환
첫째, 발주기관의 실질적 책임 강화
공공기관은 단순 발주자가 아니라, 안전관리의 ‘최상위 책임자’로 규정되어야 한다. 예산 편성 단계부터 안전비용을 명시하고, 점검이력과 위험관리계획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둘째, 사전위험평가제 의무화 및 독립검증체계 도입
해체·철거 등 고위험 공정에 대해 독립된 안전진단기관의 사전승인을 의무화해야 한다. 설계 단계부터 위험요소를 식별하고, 실행단계에서 지속 점검이 이루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법적 사각지대 해소와 지자체 감독권 강화
‘공작물’과 같은 사각지대는 모든 고위험 시설로 관리대상을 확대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가 현장점검과 안전성 검토를 직권으로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넷째, 산업안전문화 확산과 인센티브 체계 구축
단기적 교육이나 처벌 중심 정책을 넘어, 우수 안전관리 사업장에 대한 세제혜택, 입찰 가점 등 실질적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한다. 안전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인식시키는 정책 전환이 요구된다.
다섯째, 디지털 기반의 산업안전 관리시스템 구축
AI 기반 위험예측, IoT 센서 모니터링, 스마트 헬멧 등 디지털 기술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 데이터 기반의 실시간 안전관리는 ‘사고 이전에 대응하는 체계’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Ⅴ. 결론: 생명존중의 사회, 안전이 경쟁력이다
산업재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제도적 안이함이 초래한 ‘인재(人災)’이다. 법학박사로서 노동법을 연구해온 필자는, 안전은 단지 산업정책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 노동법의 핵심 가치이자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기본권 영역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제는 ‘형식적 안전관리’에서 ‘실질적 생명보호 시스템’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정부, 기업, 노동자, 그리고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거버넌스형 안전관리 체계’만이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안전은 효율보다, 경제성보다, 어떤 명분보다 우선되어야 할 절대적 공공선이다. 생명을 지키는 사회, 그것이 곧 진정한 선진국의 모습이다.
박동명
▷법학박사, (주)한국정책연구원 원장
▷(사)한국공공정책학회 부회장
▷(전)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전) 서울특별시의회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