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해는 기술이 아니다
-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회적 용기
“용서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행위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는 『인간의 조건』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에게 용서는 단순히 감정의 정리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되돌리는 힘이었다. 인간은 실수를 하지만, 용서라는 행위를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아렌트의 말은 폭력과 상처가 개인의 영혼에 남긴 흔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폭력은 시간을 멈추게 하고, 사람을 과거에 가두지만, 용서는 그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만든다.
그래서 진정한 화해는 기술이 아니라, 시간을 다시 믿는 행위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멈춘 자리에 여전히 서 있기 때문이다.
화해의 시작은 상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다시 걸어 나오는’ 일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는 『용서에 대하여(On Forgiveness)』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이 말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깊은 윤리적 사유가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용서는 ‘이해 가능한 실수’에 한정된다. 그러나 진짜 용서는 이해조차 불가능한 악에 대한 결단이다.
데리다에게 용서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긴장 상태였다. 인간은 완전히 용서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불가능 속에서 여전히 용서를 시도하는 존재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용서는 윤리의 극한에서만 가능하다.”
이 말은 곧, 화해란 우리가 이성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결단’임을 뜻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화해는 협상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는 인간의 관계를 권력의 그물망으로 보았다.
그에게 폭력은 단지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지배와 통제의 언어였다.
따라서 화해란 단순히 감정의 조정이 아니라, 권력 관계를 다시 정의하는 일이다.
가정폭력, 직장 내 괴롭힘, 사회적 혐오 등은 모두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푸코의 관점에서 화해가 의미를 가지려면, 먼저 침묵 속에서 억눌린 목소리들이 말할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진실을 말하는 자(parrhesiastes)” — 푸코는 이 개념을 통해,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강조했다.
화해는 바로 그 진실을 말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침묵한 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되찾고, 가해자조차 자신의 권력을 자각할 때, 비로소 ‘화해의 정치학’이 성립한다.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는 인간 관계의 근본을 ‘타자의 얼굴’에서 찾았다.
그는 말했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폭력을 금지한다.”
이 말은 윤리의 가장 근본적인 선언이다. 우리는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이미 그를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명령을 듣는다.
화해는 결국, 타인의 얼굴을 다시 보는 일이다.
피해자는 자신을 다치게 한 사람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수 있어야 하고, 가해자는 피해자의 얼굴을 끝내 피하지 않아야 한다.
그 눈빛이 두려움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공감으로 옮겨가는 순간, 사회는 치유의 첫 발을 내딛는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화해는 바로 그 질문에 응답하는 용기다.
화해는 대화의 기술도, 감정 조절의 방법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실존적 결단이다.
아렌트는 용서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라 했고, 데리다는 그것을 ‘불가능한 것을 향한 윤리의 실험’이라 했다. 푸코는 권력의 해체 속에서,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 속에서 화해를 보았다.
이 네 철학자의 사유는 결국 한 방향을 가리킨다.
“화해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용기다.”
그 용기는 사회를 바꾸는 정치보다 더 근원적이고, 심리치료보다 더 깊은 존재의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여전히 상처 입은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상처가 있는 곳에는 회복의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