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와 하나님: 우리는 과연 같은 신을 부르고 있는가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 하나만으로도, ‘알라’와 ‘하나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을 담아서 확신하며 사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알라’와 ‘하나님’이 같은지 다른지 따지기 전에, 지금 '하나님'이라 부르는 그 이름은, 삶 속에서 과연 '살아있는 하나님'인가?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 그 이름에 담긴 무게

 

오랜 시간 이슬람권에서 살면서, 수없이 많은 영혼과 만나고 부딪히며 가장 빈번하게 마주했던 질문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때로는 신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절박한 물음으로 다가온다. "이슬람의 '알라'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국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이 질문은 학자들의 토론실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뿌리내려야 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매일같이 부딪히는 실존적인 장벽이다. 물론, 기독교 신학자 대부분이 이미 다양한 지면과 강단을 통해 이 둘이 결코 같지 않음을 힘주어 말해왔다. 이는 단순한 교리적 구분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을 수호하기 위한 신앙 고백이다.

 

지성의 도전과 신앙의 혼란

 

그런데, 이 오랜 신앙적 합의에 잔잔하던 수면에 큰 돌을 던진 이가 있다. 금세기 최고의 기독교 지성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교수다. 그가 쓴 ‘알라’(Allah: A Christian Response)라는 책이 국내에 번역(IVP, 2016)되면서, 이 묵직한 질문은 다시금 우리 신앙 공동체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다.

 

볼프 교수는 이 책에서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같은 신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그는 두 종교가 신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을지언정, 결국 같은 대상을 향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결론 내린다. 그의 의도는 분명하다. 21세기 종교 갈등의 시대에, 서로의 차이점만을 부각하며 대립하고 배타하기보다, ‘같은 신’이라는 공통 분모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할 길을 찾자는 제안이다.

 

이러한 제안은 분명 이 시대에 필요한 울림을 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복음의 절대성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깊은 신학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전통적 접근(‘절대 같지 않다’)과 볼프 교수와 같은 비전통적 접근(‘원래 같다’)이라는 두 가지 시각으로 나누어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같음을 증명해야 할 단 하나의 조건

 

만약,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같은 존재가 되려 한다면, 반드시 충족해야 할 단 하나의, 그러나,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사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분이다. 또한, 그 십자가에서 완전한 죽음을 맞으신 예수를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리신, 곧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심장이요, 복음의 핵심이다.

 

만약, ‘알라’가 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면, 그 또한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이 증언하는 예언자 ‘이싸’(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꾸란은 그가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보였을 뿐’이며, 하나님(알라)이 그를 죽음에서 건져 하늘로 데려가셨다고 가르친다(꾸란 4:157-158).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없었으니, 당연히 무덤에서의 부활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 하나만으로도, 이슬람의 ‘알라’와 우리의 ‘하나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함을 우리는 발견한다. 이는 사소한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구원의 길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결정적인 분기점이다.

 

만약, '원래 같은 신'이라는 가정을 억지로 유지하려 한다면, 둘 중 하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수백 년의 시간적 차이를 두고 기록된 성경과 꾸란 중, 어느 하나가 예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인 '십자가와 부활'을 완전히 잘못 기록했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했다는 말이 된다.

 

존재의 본질, 삼위일체

 

논리적으로 볼 때, 이처럼 명백한 차이 앞에서 꾸란의 ‘알라’와 성경의 ‘하나님’을 다른 신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물론, 무슬림들은 오히려 반대로 주장한다. 그들은 '알라' 외에는 어떤 다른 신도 존재하지 않으며, 원래는 같았지만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변질시켜 예수를 신격화하고 삼위일체라는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냈다고 항변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두 번째 핵심적인 차이와 마주한다. 무슬림들의 ‘알라’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하거나 나눌 수 없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단일신(Unitarian)이다. 그들에게 '신이 아들을 가졌다'는 기독교의 고백은 '알라'의 유일성을 훼손하는 가장 큰 신성모독(Shirk)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단일신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한 본체 안에 완벽한 연합을 이루고 계신 ‘삼위일체(Trinity)의 유일신(Unique God)’이시다. 이는 본질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가진다. 십자가의 구속 사역 자체가 성부 하나님의 계획과 성자 예수의 순종, 그리고 성령의 적용하심이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역 안에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볼프 교수의 의도와 선교적 상황화

 

다시 볼프 교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가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같은 신’이라고 주장했을까? 그의 의도를 다원주의나 종교 혼합주의로 성급히 매도하기보다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무슬림들을 향한 그의 선교적 고뇌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볼프 교수는 유대교의 ‘야훼’, 기독교의 ‘하나님’, 이슬람의 ‘알라’ 모두가 에덴동산의 창조주이며, 인간의 타락 사건 등 많은 유사한 기록(기억)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원래’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그의 핵심은, 비록 지금은 이슬람의 ‘알라’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신학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고 있지만, 그 '알라'라는 이름을 부르는 무슬림들에게도 온전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선교학적 요청이다.

 

그는 두 종교의 본질적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이슬람과의 평화로운 공존과 복음 제시를 위한 '상황화(Contextualization)' 접근을 제안한다. 이는 진정한 사랑으로 타자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복음을 제시하자는 것이다.

 

호칭의 함정을 넘어 본질로

 

볼프 교수의 선교적 열정은 존중하지만, 우리는 이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로 ‘아랍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구주로 받아들였던 바로 그 땅, 중동에는 지금도 여전히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예배를 드리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고 있다. 7세기 이슬람의 등장 이후 수많은 아랍인이 무슬림이 되었지만, 이들은 그 땅의 원주인이자 신앙의 뿌리로서 교회를 지키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아랍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나님을 ‘알라’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아랍어 성경에서 '하나님'은 '알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알라’는 무슬림만의 전용어이며, 기독교인은 절대 그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일부의 주장은, 2천 년 신앙의 역사를 지닌 아랍 교회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슬람 백과사전에 따르면, ‘알라’라는 단어는 이슬람보다 수천 년 앞선 고대 아람어 ‘알라(Alaha)’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의 ‘엘로힘(Elohim)’과 같은 어원을 가지며,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과 아랍어를 사용하는 정교회, 가톨릭교인들을 통해 사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칭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라’라고 부르든, ‘하느님’이라고 부르든, 그 용어 자체가 아니다. 그 호칭 안에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을 담아 확신하며 사용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 삶이 대답해야 할 진짜 질문

 

이제 이 모든 신학적 논쟁의 화살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려야 한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진정으로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 놀라운 은혜에 합당한 감사를 우리의 삶 전체로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시. 우리는 입으로는 정확한 교리로 ‘우리 하나님’을 부르고 찬양한다면서도,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알라’의 단일신보다 더 차갑고 무관하며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진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안이다. 이슬람의 ‘알라’와 우리의 ‘하나님’이 같은지 다른지를 따지기 전에, 당신이 지금 '하나님'이라 부르는 그 이름은, 당신의 삶 속에서 과연 '살아있는 하나님'이 맞는가?
 

작성 2025.11.06 19:52 수정 2025.11.06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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