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의 디모데전서 2장 8-15절 강해를 통해, 예배의 질서와 남녀의 역할에 대한 신학적 오해를 바로잡고 초대교회의 역사적 정황(고린도전서 14장)을 근거로 한 균형 잡힌 해석을 제시합니다. 본문은 ‘거룩한 손’의 의미, 여성의 ‘단정한 옷’에 대한 모라비안 교도의 건축 비유, 그리고 가장 논쟁적인 ‘여자의 가르침’ 금지 구절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담고 있으며,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여성 억압이 아닌 ‘교회의 질서’(Order)에 관한 목회적 권면임을 논증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의
디모데전서 2장 8-15절 강해는 오래된 논쟁을 새로운 시각으로
비추며, 고대 본문이 오늘의 예배 현장과 목양 실천 속에서 어떤 생생한 지침이 될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 목회 서신이 특정 시대의 분쟁을 수습하려는 임시 처방으로 축소되는 것도, 반대로 시대를 초월한 보편 원리를 무시한 채 문자주의적 규범으로만 절대화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는 점에서 장재형목사는
균형의 자리로 독자를 이끈다. 특히 에베소 교회라는 대도시의 역동적 배경,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목회적 긴장, 고린도전서 14장의 질서 규정과의 상호 해석은 본문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핵심 열쇠다. 그는 본문의 첫 단락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남성들에게 요구된 ‘거룩한
손’을 공허한 제스처로 보지 않는다. 분노와 다툼으로 얼룩진
손이 아니라 화해와 정결의 손, 곧 마태복음 5장의 윤리적
급진성과 만나는 ‘관계적 거룩’의 손이라는 해석은 디모데전서 2장 강해의 출발점에 도덕적 무게를 부여한다. 예배자는 제단 앞에
예물을 가져오기 이전에, 공동체의 균열을 봉합하고 억류된 원망을 풀어야 한다. 그때 하늘을 향해 든 손은 형식이 아닌 실재가 되고, 공예배의 인도자는 ‘분노와 다툼 없이’라는 최소한의 자격을 통해 공동체의 평화를 체현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구체적 삶의 회개와 화목, 숨 가쁜 사역
일정 속에서 외면하기 쉬운 내면의 정화라는 과제를 청중에게 묻는다. 예배의 품격은 설교의 유창함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손을 드는 높이가 아니라, 그 손이 지난
한 주 어떤 일을 했는가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거룩한 손’은 예배의 자세를 규정하는 가장 날카로운 도덕적 언어가 된다.
이어서 여성의 ‘단정한 옷’에
대한 권면을 다루면서 그는 당시 에베소 교회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촘촘히 호출한다. 부유와 사치의 풍조가
공예배의 공간까지 침투하던 시대, 머리카락을 화려하게 땋아 올리고 값비싼 장신구로 치장하는 관습은 공동체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예배의 본질을 흐트러뜨렸다. 바울의 금지는 미적 감수성 자체를 폄하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배 공동체의 ‘구별됨’을
지키려는 절제의 권면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모라비안(Moravian) 공동체의 건축을 들려준다.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엮어 지은 투박한 집, 창문에 채색된 Agnus Dei 문양, 무엇 하나 완벽히 각 잡힌 곳이 없는 소박함 속에 스며 있는 경건의 미학.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27장이 ‘정(쇠 연장)을 대지 말라’고
명한 제단의 원리를 소환하며 그는 말한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인위적 치장이 아니라 순수 그 자체이며, 예배의 힘은 치장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절제된 진실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단정한 옷’은 특정 복장 규정이 아니라 신앙의 미학을 가늠하는 영적
태도에 가깝다. 화려함을 금해야 해서가 아니라, 본질을 잃지
않기 위해. 예배의 구별됨을 회복하기 위해.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예배의 자세’라는 관점에서 디모데전서 2장 8-10절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한다.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11-12절의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라는 구절이다. 현대의 독자가 이
문장 앞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불편을 감추고 있을 뿐일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불편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본문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자고 제안한다. 핵심은 여성 억압인가, 아니면
교회의 질서인가. 그는 고린도전서 14장을 가져와 초대교회
공예배의 실제 현장을 그려낸다.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무질서로 분출되던 공동체, 여기저기에서 방언이 터지고 예언이 이어지며 설교의 흐름은 자주 끊겼다. 바울은
은사를 금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언하기를 힘쓰라”“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도 막지 말라”고 했다. 다만 “모든 것을 품위 있게, 질서
있게” 하라고 했다. 통역이 없으면 방언은 공동체 앞에서
멈추어야 하고, 예언은 둘이나 셋이 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해야 하며,
중복되는 게시가 임하면 먼저 말하던 사람은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바로 그 질서의
문맥에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명령이 등장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문장이 여성의 지적·영적 열등을 선언하는 문장이
아니라, 무질서로 기울던 한 축을 바로 세우기 위한 ‘목회적
권면’이었다고 설명한다. 당시 교회에서 상대적으로 큰 폭으로
자유를 누린 여성 신자들의 열정은 선하지만, 공예배에서의 통제 없는 발언은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해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성’ 일반이 아니라 ‘무질서’였고, 처방은 ‘침묵’ 일반이
아니라 ‘품위와 절차’였다.
이렇게 이해할 때, 디모데전서 2장 12절은 특정 성별에 대한 영구 금지 조항이 아니라, 예배의 공적
권위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적 원리—권위의 남용을 막고 공동체의 집중을 보존하려는 원리로 읽힌다.
그렇다면 13-14절의 창조·타락
순서 언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여성 비하의 근거가 아니라 질서를 설명하려는 바울의
논증 전략이라고 본다. 창조의 순서가 우열을 의미한다면, 창조의 ‘마지막’에 지어진 여성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절정이라는 상징도 가능하다. 바울 자신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주 안에서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다”고 했던 상호
의존의 신학을 상기하면, 창세기의 질서 언급은 계급화를 위한 사다리가 아니라 관계를 위한 틀이다. 에베소서 5-6장에서도 바울은 약자의 순종을 먼저 언급했지만, 그 직후 강자에게 더 무거운 책임을 부과한다.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처럼
사랑해야 하며, 아버지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하고, 상전은
종을 협박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기독교적 권위의 역설이
“섬기는 자가 주인이다”라는 짧은 명제로 집약된다. 권위는
특권이 아니라 섬김의 책임이며, 주님 앞에서 모두가 동일한 피조물로 선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성 안수 논쟁에 디모데전서 2장 12절을 곧바로 가져와 ‘성경대로’라는 명분으로 제재를 가하는 태도는 바울의 목회적 의도를 가볍게 만드는 위험이 있다. 본문은 특정 시대·장소의 무질서를 다루며 세워진 질서의 원리를 말한다. 그 원리를 오늘의 교회가 충실히 재맥락화할 책무가 바로 신학적 해석의 일이다.
장재형목사는 여성 리더십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해버리는 태도 대신, 은사와 품위를 겸비한
공적 리더십이 공동체적으로 검증되는 절차를 확립하는 것이 바울의 정신에 가깝다고 제안한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문장이 아닌, ‘모든 것을 점잖게, 질서 있게’라는 결론이야말로 본문 전체를 지배하는 대원칙이라는 것이다.
이 대원칙은 오늘의 예배 실천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먼저 ‘거룩한 손’에 담긴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성가대의 화음보다 화해의 실천이 먼저이며, 예배의 조명보다 양심의
빛이 밝아야 한다. 교회의 의식은 풍성해질 수 있지만, 그
의식이 성도를 덮고 보이지 않게 만드는 순간, 예배는 본래의 무게 중심을 잃는다. 따라서 설교자는 뛰어난 수사 이전에 정직한 회개로, 기도 인도자는
장엄한 억양 이전에 낮아진 마음으로, 헌금 인도자는 격려의 말 이전에 깨끗한 손으로 서야 한다. 다음으로 ‘단정함’은
교회가 사회와 단절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구별되기 위해 취해야
할 공적 미학이다. 모라비안의 집이 완벽한 직각 대신 투박한 아름다움을 택했듯, 예배도 눈에 띄는 장식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순수의 밀도를 높여야 한다. 그
순수는 가난과 불편을 미화하는 금욕이 아니라, 목적에 맞춘 절제와 본질에 대한 충성으로 드러난다.
논쟁의 불꽃은 늘 11-12절에서 가장 높이 치솟는다. 그러나 본문의 마지막, 15절은 논쟁을 실천으로 되돌리는 중요한
문장이다. “여자가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공동번역 성서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풀어준 이 구절은 여성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금욕 선언이 아니라, 가정과 공동체의 생명 돌봄을 신학적으로 존귀하게 선언하는 축복의 문장으로 읽힐
수 있다. 낳음과 기름은 생물학적 모성을 넘어 영적 모성과 부성, 곧
다음 세대를 복음으로 양육하는 교회의 공동 책무로 확장된다.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그리고 정절은 사역의 성과보다 더 깊은 차원의 열매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공예배에서의 절제가 곧 존재의 무가치를 의미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하나님이 그 삶을 기억하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질서’는 억압이 아니라 공간이다.
은사가 꽃피고, 책임이 다지고, 자유가 타인의
자유와 조화롭게 만나는 공간이다.
오늘의 교회는 고도로 연결된 세계 속에서 과거보다 더 많은 정보와 더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신자들과 함께 예배한다. 그만큼 공적 질서를 세우는 일은 더 어렵고 더 중요해졌다. 여성
안수 문제처럼 교단과 지역에 따라 해석과 실천이 다른 사안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때 디모데전서 2장 8-15절은 ‘한
줄 문장’으로 재단되는 문서가 아니라, ‘한 장의 설계도’처럼 읽혀야 한다. 남성의 분노와 다툼을 거둬내고 ‘거룩한 손’을 들어 예배를 이끌라는 윤리, 여성에게 화려함의 권리를 박탈하려는 금지 대신 예배의 본질을 지키려는 단정의 권면, 공예배의 무질서를 성급히 치워버리기보다 성령의 역동성을 보존한 채 품위와 절차를 정비하려는 지침, 그리고 가정과 공동체의 생명을 돌보는 사명을 신학적으로 격상시키는 축복.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축은 ‘교회의 질서’다. 그리고 그 질서는 권력의 사다리가 아니라 섬김의 구조다. 많이 섬기는
자가 더 큰 권위를 갖는 공동체, 곧 “섬기는 자가 주인이다”라는 복음의 역설이 실제가 되는 공동체가 디모데전서가 꿈꾸는 교회다.
장재형목사는 이 설교문에서 본문을 둘러싼 오해와 과장을 걷어내고, 신학적
해석이 반드시 역사적 정황과 목회적 현실 속에서 다시 시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디모데전서와
고린도전서를 교차해 읽는다. 에베소 교회가 겪던 갈등과 고린도 교회의 무질서는 다른 사건이지만 같은
원리로 다루어진다. 은사는 억압되지 않아야 하고, 예배는
혼란스러워서는 안 된다. 지도자는 도덕적 무게를 지녀야 하고, 성도는
절제의 미학을 익혀야 한다. 교회는 해방의 공간이어야 하고, 해방은
질서 안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여성은 억압되지 않아야 하고, 남성은
특권을 주장할 수 없다. 주님 앞에 모든 성별과 세대가 동등하게 서며,
각자의 은사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선용되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일—이것이 바울의 의도이며, 장재형목사가 오늘의 교회에 요청하는 과제다.
결국 디모데전서 2장 8-15절은
시대착오적 금지령의 텍스트가 아니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누가 더 높은가’가 아니라 ‘어떻게 더 잘 섬길 것인가’를 묻도록 하는 교회의 설계도다. 분노와 다툼을 내려놓고 거룩한 손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남성들, 단정함과
선행으로 공동체의 본질을 지키는 여성들, 은사들이 복음 안에서 서로를 살리는 방향으로 운용되도록 질서를
세우는 지도자들, 생명의 돌봄을 삶의 고귀한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세대. 이런 교회의 모습이야말로 에베소 교회와 고린도 교회를 넘어 오늘의 도시와 마을에서 다시 살아 움직여야 할 복음의
풍경이다. 장재형목사의 강해는 그 풍경을 향해 독자를 초대한다. 그리고
그 초대는 단 하나의 요청으로 요약된다. 다만 모든 일을 품위 있게,
질서 있게 하라. 그 품위와 질서가 억압의 다른 이름이 되지 않도록, 섬김의 구조를 더 깊이 세우라.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예배가 화려한
장식보다 순수의 밀도로 빛나도록, 공동체의 권위가 권력의 높이가 아니라 섬김의 깊이로 측정되도록, 성령의 역동이 무질서의 소음이 아니라 복음의 질서 속에서 울려 퍼지도록, 교회는
끊임없이 자신을 개혁하라. 이 요청을 붙드는 한, 디모데전서 2장의 옛 문장이 오늘의 교회를 다시 살릴 것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장재형목사의 디모데전서 2장 강해는 신학과 목양, 질서와
자유, 섬김과 권위가 만나는 교차로를 향해 분명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