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의 4부작 <소년의 시간>은 시간대를 달리한 네 컷짜리 영화다. 이를 드라마라 부르지 않고 영화라 지칭하는 이유는, 일반적 드라마의 구성(한 편이 ‘발단-전개-위기-절정’ 구조를 갖고 결말은 마지막 편에 제시되는 방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각 편이 독립적인 기승전결을 갖지 않으며, 전체 4부작을 하나의 영화로 보면 3부가 명확한 위기이자 절정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1부부터 4부까지를 한 번에 관람해야 비로소 완결성이 드러난다.
각 에피소드는 한 컷(one-take)으로 촬영되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실험이 아니라,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인물의 감정 변화를 실시간으로 체험하게 하는 장치다. 원테이크는 편집을 통한 인위적 리듬 조절을 배제함으로써 서사를 ‘경험의 지속’으로 전환시킨다. 따라서 관객은 사건을 ‘보는 자’가 아니라 ‘통과하는 자’가 된다. 원테이크 촬영은 스텝과 배우진들이 연극 무대처럼 한 번에 끝내야 하므로 난이도가 매우 높다. 실내 촬영에서는 조명 장비가 함께 이동하거나 숨겨야 하며, 엑스트라의 실수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다. 후시 녹음을 따로 하지 않는 한 동시 녹음 작업의 어려움도 크다. 특히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2부의 촬영은 경이적이다. 쉴 새 없이 주 등장인물들이 바뀌며 실내와 실외를 오가는 촬영은 기술적인 부분에서 놀라움을 준다. 특히 학교 추모 현장의 형사의 얼굴에서 시작하여 후반부에 이르러 드론 촬영으로 살해 현장으로 날아간 후 그곳에 추모하러 온 제이미 아버지 '에디'의 얼굴로 끝나는 수미상관 구조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아버지 역으로 나온 스티븐 그레이엄은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알 카포네 역으로, 피키 블라인더에서 헤이든 스태그 역으로 얼굴을 알린 바 있어 남성적인 갱 영화에서 굵직한 배역으로 잘 어울리는 인상을 가지는 배우이다. 이 작품에서 남성성은 꽤 중요한 주제로서 작용하고 있는데, 4부에서 낙서된 자신의 차에 페인트를 부어버리는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스티븐 그레이엄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각본, 제작, 총괄 프로듀서로서 참여하고 있어 거의 그의 작품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는 오랜 배우 경험에 의해 배우들의 연기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한 작품을 선보였다.
앞서 언급했던 절정부에 해당하는 3부는 심리상담사와 제이미의 상담 내용만을 다룬다. 이 영화의 절정부에 해당하며 이 사건의 동기가 제시되는 부분이라 단순한 배경과 등장인물만이 연극무대에 오른 것 같지만 배우들의 명연-특히 주연을 맡은 오언 쿠퍼의 연기는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에이미상을 거머쥐는 게 당연하게 보일 정도의 명연을 펼친다.-으로 긴장감이 상당하다.
4부의 남은 가족들은 도피보다는 '견딤'을 선택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훈육으로 자신을 길들였기 때문에 아들 제이미를 같은 방식으로 키우지 않았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밤늦게까지 SNS세상에 빠져드는 아들이 큰 문제 없이 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분노 조절 장애를 보고 배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2부에서 배스컴 형사와 그의 아들 애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어른들은 아이들의 세계에 대해 모른다. 아이들은 SNS에 자신들만의 언어로 소통한다. 그 속에서는 사이버불링, 인셀 문화, 20:80 법칙 등이 통용된다. 외모는 중요하며 혐오에 동조하고 남성과 여성을 나누어 대립한다. 사이버 세계 안에서 극단적인 행위는 쿨한 행위이거나 용기 있는 실행으로 칭송받는다. 혐오 대상에 대한 단죄가 실제 세상에서 일어나 범죄가 될 때 이들은 죄책감을 상실한다. 윤리성이 상실된 사이버 세상 안에서의 안락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학원과 학교 공부로 놀이를 빼앗긴 아이들은 SNS와 게임으로 이동했다. 이제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혹은 학원 복도에서 실제로 만나긴 하지만 휴대폰을 들고 그 안의 게임 세상에서 논다. 운동 부족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태권도 학원에서, 줄넘기 학원에서 돈을 내고 몸으로 하는 놀이를 즐긴다. 이른바 어른들의 통제권 안에서 아이들은 자란다. 아이들은 그 속에서 자신들만의 모바일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 세상은 아이들에게 현실 세계보다 중요하다. 시스템에서 벗어난 암호화된 놀이 세상에서 윤리성은 따분한 꼰대 취급을 당한다. 이 허약한 질서는 외부 세력에 이용당하기 쉽다. 스티븐 그레이엄이 연출자적 위치에서 제시한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사이버 세상을 방치할 것인가?"
이는 단순히 청소년 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통제권을 잃은 사회’에 대한 경고다. 영화는 강력한 개입과 새로운 윤리 교육의 필요성을 시사하며, 원테이크의 연속된 시간처럼 ‘사회적 회복의 시간’ 또한 단절 없이 이어져야 함을 암시한다.
**K People Focus 모하지 칼럼니스트** (mossisle@gmail.com)
영화와 음악을 사랑하며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희망의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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