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리토크라시'는 실력과 성과로 지위를 결정하는 사회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출발선이 다르다면, 과연 그 사회는 공정할 수 있는가. 태어날 때부터 부와 환경, 교육 기회의 차이가 크다면, 성과 중심 사회는 결국 불평등을 더욱 강화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런 현실 속에서 양심이 흔들리고, 마음이 아프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실을 드러낸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만, 주님은 중심을 보신다”(사무엘상 16:7, 현대인의 성경). 인간 사회는 언제나 성과와 눈에 보이는 능력을 기준 삼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과 본질을 보신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비교와 경쟁의 굴레에 묶여 있다. 더 많이 이루어야 가치 있는 존재라 여기는 세상 앞에서, 우리의 영혼은 점점 지쳐 간다.
우리는 자녀에게 좋은 기회를 주고 싶어 애쓴다. 그러나 동시에 양심 깊은 곳에서는 질문이 일어난다. “나는 공정한가. 나는 혹시 다른 이들의 출발선을 무너뜨리며 내 자리를 지키고 있지는 않은가.”
'메리토크라시'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종종 은밀히 특권을 쌓고,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우리의 마음은 불안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높은 성과를 낼 사람이 나타나고, 결국 우리는 또 다른 비교 속에서 무너진다.
바울은 우리 내면의 공허함을 꿰뚫어 보듯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로마서 3:23, 현대인의 성경). 우리의 성취는 하나님의 영광에 닿지 못한다. 우리가 자랑하는 실적과 지위도 결국 영원한 기준 앞에서는 무너진다. 그렇다면 메리토크라시의 냉혹한 질서는 우리에게 참된 희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은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로마서 3:21, 현대인의 성경). 인간 사회의 불완전한 공정은 사람을 상처 입히지만, 하나님의 의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배운 자든 배우지 못한 자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우위에 설 수 없다.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참된 공평을 발견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조차 메리토크라시의 논리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봉사와 업적, 헌금과 직분으로 서로를 평가하며 은밀히 계급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의 시선은 달랐다. 그는 성전에서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셨다. 세상은 실적을 보았지만, 주님은 마음을 보셨다. 이것이 복음의 정의요, 하나님의 공정이다.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메리토크라시'라는 세상의 거짓 공정에 사로잡힐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는 복음을 붙들 것인가. 세상의 질서는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들지만,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이보다 앞서야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 값없이 의롭다고 하심을 얻은 존재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공정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공정을 증언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자와 약한 자의 편에 서야 한다. 우리는 차별 없는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참된 공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의 공정은 무너져도, 십자가의 공정은 영원하다. 오직 복음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평등을 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