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샤카스바비큐 인문학 - “중이 제 머리 깍는다.”

나는 항상 현실에서 스스로 혼자 머리를 자르고 다듬는다. 

 

 어젯밤, 머리를 자르다 딸래미에게 마무리를 부탁했다. 여기저기 집중해서 자르는데 쥐가 뜯어먹은 듯 엉망이 되어 버렸다. 방법이 없어 스스로 하얗게 밀어버렸다. 꿈이었다.

 

 인간은 스스로를 깎고 다듬는 존재다.

  

 

 스스로를 깍고 다듬는 행동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습성이 되었다. 문명과 원시의 경계를 가르는 핵심이기도 하다.

 

 온 몸에 진흙을 바르고, 돌로 머리칼을 자르는 순간부터, 또는 불로 털을 태우고 재로 얼굴에 과장된 표현을 하는 순간까지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고 다듬으며 살아왔다.

 

AD / 본 광고는 컬쳐엔이 제공하였습니다

 

1. 내 머리를 내가 깎는다는 것

 

 내 머리를 내가 스스로 깎는 행위는 나와 내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이고 타인의 시선에 대한 야만적 거부감이다.

 

 삶이 뒤엉킬 때, 거울 앞에 선 나를 빤히 바라보며 이발기를 든다. 윙윙거리는 기계소리와 떨어지는 머리칼, 수채구녕으로 빨려 들어가는 머리카락의 잔해를 보면서 현재의 나를 버린다. 그것은 내 인생의 그을음을 내 손으로 정리하는 행위이자, 내 삶의 깨달음을 향한 나만의 의식이다.

 

 스스로를 다듬는 행위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닿아 있다. 인간은 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속세의 때가 묻고, 알던 모르던, 크던 작던 죄를 짓고 양심을 속일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인생이라 위안 삼으며 시간을 이어 살아간다.

 

 나의 머리를 자르는 의식은 나만의 고해성사다. 흐트러진 삶의 균형을 맞추고, 상실한 방향을 바로 잡으며 순간을 다듬고, 결국엔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본다.

.

 이러한 행위는 바비큐의 불과 닮아 있다. 불은 늘 태우고 지우면서 형태는 사라지고 본질만 남긴다. 그것이 불의 철학이고, 우주와 자연의 섭리이며 인간 스스로의 본성이다.

 

 불 앞에 서는 이유 또한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고 행위의 의식이다. 소실과 생성이 한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2. 내 딸에게 머리를 맡긴다는 것

 

 그런 내가 머리를 옆에 있던 딸에게 맡겼다. 이것은 단순한 장면이 아니다. 나의 세계를, 내가 늘 통제해 오던 나만의 질서를 타인에게 위임하는 장면이다.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자 신뢰의 실험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가진 가장 큰 불완전의 순간이기도 하다.

 

 내 기준이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지만, 딸은 나의 일부이자, 다른 세대의 전령이다. 그녀는 나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세상의 감각은 이미 다르다.

 

 그녀가 내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내 삶의 형태를 새로운 세대가 다듬는다’는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엉망이 되었을 때 세상은 어쩌면 이제 내 기준으로 정리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어느새 파이오니어(Pioneer)에서 후손에게 넘겨주어야 할 구세대(Old fart)가 되어 있었다.

 

3. 머리를 밀어버린다는 것

 

엉망이 된 머리를 바라보다가 나는 결단한다. 이발기를 들고, 머리를 밀었다. 아주 하얗게 밀었다. 그건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리셋의 의식이었다.

 

 형태를 버리고 본질로 돌아가는 행위, 인간은 가끔씩 삶의 어느 시점마다 이런 리셋의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있지만 행동하기는 쉽지않다. .

 

 그 동안 쌓아온 경험과 타인의 시선, 사회적 역할, 세상의 질서, 그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원초적 자아’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폭풍처럼 밀려온다. 그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불이 모든 것을 익히고 조용히 새로운 결과를 내밀듯이 삶도 극단을 경험한 후에야 본질적 순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불 앞에 서 있는 나는 이 감각을 장작이 타닥일 때마다 느낀다. 불은 너그러움 없는 잔인함으로 몰아 부치지만 그것이 만들어 내는 맛은 깊이는 놀라울 정도로 경이롭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계기가 없으면 자극이 없고, 자극이 없으면 변화도 없다. 변화없는 새로움은 창조되지 않는다. 고통 없는 성숙 없고, 소실없는 재건은 더 더욱 없다.

 

4. 불, 인간, 그리고 자기 성찰의 미학

 

 불은 인간의 첫 번째 스승이었다. 불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고 인간이 인간답게 진화할 수 있는 섭리를 주었다. 섭리란, ‘세상이나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어떤 초월적인 힘(주로 신)’을 의미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올림푸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줄 때 신과 같은 창조의 능력을 함께 준 것이다. 그것은 문명 그 자체였고, 인간에게 요리와 기술, 언어와 예술, 자유와 사랑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었다.

 

 “태워야 남는다.” “모든 창조는 소멸에서 비롯된다.” 고기를 굽는다는 것 또한 형태를 없애고 새로운 생명을 키워내는 재탄생의 과정인 것이다.

 

 내가 머리를 민다는 것과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다는 것은 서로 맥이 이어져 있고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내 안의 불필요함을 덜어내고 갈등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자신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불은 소실이고, 소실은 정화이며, 정화는 새로운 진화를 탄생시킨다. 인간은 그렇게 삶을 이어왔다. 불 앞에 선 사람과 거울 앞에 서서 바리깡을 든 사람은 나 라는 같은 존재다.

 

5. 결론 — 불 앞에서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지난 꿈이 머릿속에 남아있디. 머리를 깍다 딸에게 부탁하고 망가진 머리를 하얗게 밀었다. 

 그것은 실망스러움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고 변화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것은 자기 리셋과 새로운 포맷에 대한 자신감이며 세속의 때를 벗겨내고 본질로 돌아가려는 야만의 순수한 몸짓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언제나 불 앞 선 나의 모습과 겹쳐있다. 

 

 불은 인간에게 늘 같은 질문을 던진다. 

 

 “오늘은, 어떤 나를 태워 보낼 것인가?”

 

 바비큐는 그대로 철학이 된다. 고단한 삶의 불꽃이 타오르고, 신비로운 연기와 향이 어우러진 원초적 자유가 된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불의 철학이고 긍정적 변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저자

Shaka (차영기, 경기도 화성시, 샤카스바비큐)

프로바비큐어

바비큐 프로모터 겸 퍼포머

대한아웃도어바비큐협회 회장

바비큐 작가

Korea Barbecue University

Korea Barbecue Research & Institute

이메일 araliocha@gmail.com(010-2499-9245)

작성 2025.10.16 15:00 수정 2025.10.16 15:00

RSS피드 기사제공처 : 컬쳐플러스뉴스 / 등록기자: 박철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해당기사의 문의는 기사제공처에게 문의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