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국경선이 있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견고한 벽이다. 우리는 이 벽 안에서 안정을 느끼고, 익숙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문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신음 소리에는 애써 귀를 막아버린다. 분주한 일상을 핑계 삼아,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방식의 슬픈 자화상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 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 내가 소속된 집단의 사람만이 나의 ‘이웃’이라는 암묵적인 동의 속에 우리는 살아간다.
한 율법 교사가 예수께 물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 이 질문은 순수한 지적 탐구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랑의 대상을 선별하고 한정하여 자신의 의무를 최소화하려는, 교묘한 자기 정당화의 심리가 숨어있다.
누구까지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이 질문은 2천 년 전 한 율법 교사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나의 묻고 있음이며, 당신의 망설임이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기 전에 자격과 조건을 따지고, 이해득실을 계산하며 내 마음의 국경선을 더 높이 쌓아 올리고 있다.
예수는 이 교활한 질문에 직접 답하는 대신, 하나의 이야기로 그 질문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한 유대인. 동족이자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종교적 규율과 정결법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위험에 대한 두려움, 번거로움에 대한 계산이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은 울렸을지 모르나, 그들의 심장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율법은 있었으나 사랑은 없었고, 지식은 있었으나 생명은 외면당했다.
그때, 유대인들에게 멸시받고 개처럼 취급받던 한 사마리아인이 등장한다. 그는 길가에 쓰러진 원수를 본다. 그의 안에서 어떤 계산이 일어났을까? 어떤 종교적, 민족적 갈등이 그의 마음을 스쳐 갔을까?
성경은 단 한마디로 그의 모든 행동을 설명한다. “보고 불쌍히 여겨”(눅 10:33). 머리가 아니라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그의 내장(σπλαγχνίζομαι)이 뒤틀리는 듯한 아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끌어안는 거룩한 연민이 그의 모든 것을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가던 길을 멈추고,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상처를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다. 시간과 물질, 그리고 안전까지도 기꺼이 내어주었다.
예수는 이야기를 마치고 율법 교사에게 되묻는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질문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대상의 문제에서 ‘누가 이웃이 되어주었는가?’라는 행동의 주체 문제로 전환되었다.
이웃은 내가 정해 놓은 경계선 안에서 발견되는 존재가 아니다. 이웃은 나의 도움이 필요한 바로 그 사람에게, 내가 기꺼이 경계선을 넘어 다가갈 때 창조되는 관계다. 사랑은 자격 있는 대상을 고르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가 자격 없는 이에게 다가가는 행동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강도 만난 자들이 신음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절망에 빠진 가장, 관계의 단절 속에서 홀로 우는 청년,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낙오된 소외된 이들, 혐오와 차별의 시선에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는 여전히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그들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며 우리의 안락한 성전으로 숨어들고 있지는 않은가. 복음은 우리에게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기 전에, ‘너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를 먼저 물으라고 명령한다.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 우리의 마음이 아파하는 곳,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바로 그곳에 우리의 이웃이 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익숙한 경계선 안에 머물며 반쪽짜리 사랑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상처받을 용기를 내어 경계선을 넘고 누군가의 상처를 싸매주는 진정한 이웃이 될 것인가.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바로 그 경계선을 허무는 사랑이었다.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셨고, 이방 여인과 대화하셨으며, 마침내 자신을 못 박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 위대한 사랑의 부르심 앞에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이웃은 찾는 것이 아니라, 되어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