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군단 주요 인물 -천안 독립기념관 전시
생업이 있는지라 평소에는 먼 곳에 있는 독립운동 관련 장소를 답사하기 힘들다. 긴 연휴 시간을 내서 천안에 독립기념관을 다녀왔다.
전시 중 하나가 독립군단 주요 인물이었다. 개인적으로 성의 없는 전시 같았다. 사진 속 15명의 독립운동가 중 일반인은 몇 명이나 알 수 있을까. 해방 후 역사교육에서 독립운동가를 많이 알려주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독립운동과 역사 관련 장소를 다니면서, 모르는 독립운동가가 너무 많은 것에 반성한다. 대단한 항일운동 업적을 이룬 분들도 최근에 알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진과 작은 글씨로 적은 이름 하나로 주요 인물이라 해 버리면 관람객이 다 알 거라 여기는 이는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최소 교과서에라도 나왔으면 모를까, 일반인이 어찌 다 알 수 있는가. 15분 중 5분 정도만 알아도 역사에 관심 있고, 10분까지 안다면 꽤 깊은 역사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일 것이다. 11분 이상 아는 분은 이 기사를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몰랐던 독립군단에서 항일운동 했던 분에 대한 기사를 써 보려고 한다. 참고로 사진 속 15분의 성함은 다음과 같다.
안무 | 최해 | 지청천 | 이회영 | 양기하 |
서일 | 전덕원 | 김좌진 | 김동삼 | 이상룡 |
홍범도 | 오동진 | 신팔균 | 이범석 | 변강렬 |
상단 왼쪽부터 어떤 분인지 알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청전((靑田) 안무(安武) 선생님은 1899년 대한제국 육군 진위대(鎭衛隊)에 입대한 후 경성(京城) 교련관양성소(敎鍊官養成所)를 거쳐 종성군(鍾城郡) 진위대 교련관으로 근무하였다.
참고로 진위대는 1895년(고종 32) 9월 지방의 질서 유지와 변경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된 최초의 근대적 지방 군대이다.
그러나 1907년 일제가 정미 7조약 또는 한일신협약으로 강제로 군대를 해산시켰다. 협약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게 일제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이고 강제로 맺은 조약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알수록 이런 용어 정리가 되지 않은 부분이 화가 난다. 일제 입장에서 협약일 수 있지만, 조선의 처지에서 협약이라 불러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정미 7조약을 맺게 된 계기 자체가 굴욕적이다. 헤이그 특사를 고종이 파견한 것에 대해 일제가 트집을 잡은 것이다. 헤이그 특사 파견은 독립 국가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폐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해산 후 함일학교 체육교사로 일한 후 보성학교에서 근무하셨다. 무산의 보성학교에서 근무하던 중 일제에 순응하는 학교 상황을 보시고 그만두게 된다. 참고로 무산은 울산의 옛 지명으로, 보성학교는 현재 울산 동구 일산해수욕장에 기념관이 있다. 초대 교장 성세빈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민족 정신 교육을 위해 세운 학교이다.
안무 선생님은 북간도 허룽현(和龍縣)으로 망명하시고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을 하셨다. 1920년 대한국민회군 사령관에 취임하셨고,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를 지휘하고 1920년 10월 21일 이후 청산리전투를 지휘하셨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모두 성공적이었기에 일제의 탄압은 심해졌다. 일제는 근거지가 될 마을을 초토화하며 복수했다. 그래서 부대는 러시아의 원조를 기대하며 자유시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하지만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다시 북간도로 돌아오셨다. 독립군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시던 중, 마안산록(馬鞍山麓)의 한 가옥에 잠복하고 있는 것을 탐지한 용정 일본 영사관 경찰서 관헌의 습격을 받았다. 총격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셨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