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해 가을, 태풍이 할퀴고 간 제주 바다는 유독 시리고 푸른빛이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과 색깔이 바다의 깊은 숨결 속으로 가라앉은 듯한 새벽. 어둠도 빛도 아닌, 그 경계의 푸르스름한 빛이 현무암 갯바위에 스며들 때면 나는 종종 세상의 끝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밤새 제멋대로 울부짖었을 파도가 토해낸 것들로 함덕의 해변은 거대한 무덤처럼 보였다. 셀 수 없는 불가사리들. 마치 하늘의 별들이 한꺼번에 떨어져 검은 모래 위에 산산이 부서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작은 생명들은 축축한 모래 위에서 자신들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광경 앞에서는 어떤 감상도, 어떤 위로의 말도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저 거대하고, 냉정하고,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라는 단어만이 내 머릿속을 차갑게 맴돌 뿐이었다.
그때 그 노인을 보았다. 처음엔 그저 풍경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해무 속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실루엣. 하지만 그의 움직임에는 이상한 규칙성이 있었다. 마치 바다의 신에게 제를 올리듯, 그는 쉼 없이 허리를 굽혔다 펴고 있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나를 그에게로 이끌었다. 가까이 다가가 본 그의 모습은, 뭐랄까,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불가사리를 줍고 있었다. 이미 땀으로 축축이 젖은 얼굴, 거친 숨소리. 하지만 소금기에 절어 굵어진 그의 손길은 갓 잡은 전복을 다루듯 조심스러웠고, 그가 던지는 불가사리의 포물선은 절망의 해변에 그리는 한 줄기 희망의 궤적 같았다.
솔직히 말해, 처음엔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어르신이로군.’ 도시의 삶에 지쳐 제주로 잠시 도망쳐 온 내 안의 냉소는 그렇게 속삭였다. 수년간 세상에 치이며 체득한 나의 ‘현실 감각’은, 그의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고 무의미한지를 끊임없이 계산해 내고 있었다.
이 넓은 해변, 저 수많은 불가사리. 저 노인의 미미한 손길이 과연 무엇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전복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저 해로운 것들을 왜. 결국 해가 뜨면 모든 것은 끝날 텐데. 이 생각에 사로잡히자, 나는 그를 멈추게 해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마저 들었다. 헛된 희망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으니까.
"어르신, 지금 그만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많은 걸 다 살릴 수도 없을뿐더러, 결국 대부분은 죽게 될 텐데요. 헛수고일 뿐입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갔다. 그것은 안타까움이라기보다는, 세상을 향한 나의 오랜 원망과 체념이 섞인 것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노인은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내가 평생 본 제주의 그 어떤 바다보다 깊고 고요했다. 마치 내 안의 그 모든 냉소와 절망을 이미 다 겪어내고, 그 너머의 어떤 진실에 가만히 닿아있는 눈빛이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내 교만함마저 부드럽게 감싸안은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이 말이 맞네. 내 힘으로 이 모두를 구할 수는 없겠지."
그러고는 다시 허리를 굽혀, 제 발치의 검은 현무암에 달라붙어 있던 작은 불가사리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의 주름진 손에 들린 그 생명은 유난히 더 작고 연약해 보였다. 그는 그것을 바다 쪽으로 힘껏 던졌다. ‘풍덩-’. 그 작은 소리가 내 심장을 때렸다. 노인은 그 소리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나를 보며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방금 저놈한테는 의미가 있었지. 저 한 놈에게는, 나의 이 짓이 세상 전부였을 게야."
그 순간, 무언가 내 안에서 무너져 내렸다. ‘의미’와 ‘효율’과 ‘결과’를 따지며 세상을 재단하던 나의 견고한 성벽이, 그 소박하고 단순한 진실 앞에서 힘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그의 행동이 헛수고가 아니었다.
진정한 헛수고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해 버린 나 자신의 무기력함이었다. 그는 세상을 구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기 손이 닿는 단 하나의 생명을 구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단 하나의 생명에게, 그는 세상 그 자체였다.
우리는 너무 자주 ‘세상’이라는 거대한 단어 뒤에 숨어버린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내 눈앞의 작은 문제 하나를 외면한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감에, 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날 이후, 나는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내 삶 속에도 수많은 ‘불가사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의 망설이는 눈빛, 위로받고 싶어 하는 친구의 떨리는 목소리, 불의 앞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연약한 외침들. 나는 여전히 그 모든 것을 해결할 힘이 없다. 나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내가 세상 전체를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나의 작은 손길이 닿는 단 한 사람에게는, 내가 그의 세상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나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나의 작은 친절이, 나의 미약한 용기가, 한 영혼을 절망의 해변에서 건져내어 삶의 바다로 돌려보내는 기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새벽, 제주의 이름 모를 노인이 내게 던진 것은 불가사리가 아니라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평생토록 내 영혼에 메아리치고 있다.
오늘 나는 문제의 거대함에 압도되어 돌아서는 자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발밑의 단 한 생명을 위해 기꺼이 허리를 굽히는 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