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여성의 침묵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여자는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이 필요하다.”라고
『자기만의 방』에서 선언했다. 하지만 『등대로(To the Lighthouse)』에서 여성은 여전히 침묵 속에 존재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 램지 부인은 거의 매 장면에서 가족을 위해 봉사하고, 분위기를 조율하며, 남편과 자녀들의 감정적 중심축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울프는 그녀의 내면을 세심히 그리되, 그것이 직접적 언어로 표현되지는 않도록 배치했다.
침묵은 그녀의 무기이자 동시에 족쇄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였다.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여성은 '말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그녀가 침묵하는 동안, 남편은 철학을 논하고, 자녀들은 각자의 욕망을 키워간다.
울프는 이 침묵을 단순한 조연적 미덕이 아니라, 억압된 여성성을 구성하는 정치적 장치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 침묵은 『등대로』 전체를 감싸는 정서적 배경이 된다.
2. 램지 부인과 릴리 브리스코, 두 여성의 길
『등대로』에는 두 명의 뚜렷하게 대비되는 여성 인물이 있다. 램지 부인은 전통적인 여성성, 특히 ‘돌봄’의 화신처럼 묘사된다. 그녀는 남편의 기분을 맞추고, 아이들의 요구를 예상하고, 손님들의 관계를 조율하며 “가정의 빛”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반면 릴리 브리스코는 화가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없으며, 예술적 자기표현을 삶의 중심에 둔다. 이 두 여성은 한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서로 다른 미래를 향해 걷는다.
릴리는 램지 부인을 동경하면서도 그 삶을 반복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녀는 그림 앞에 앉아 자신만의 시선을 찾고자 애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붓을 들어 끝내 한 줄을 긋는다. 그 장면은 단순한 그림 그리기가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되찾는 선언이다.
울프는 이처럼 '돌봄의 여성성’과 ‘표현의 여성성’을 병렬적으로 제시하며, 여성 주체성의 다층적인 가능성을 드러낸다.
3. 돌봄이라는 이름의 굴레, 그리고 저항
램지 부인이 수행하는 ‘돌봄’은 자발적인 헌신이 아니라 역할로 강요 된 윤리다. 그녀는 스스로를 ‘좋은 아내’, ‘이해심 많은 어머니’로 다듬지만, 그 내부에는 수많은 갈등이 숨어 있다. 그녀는 때때로 지치고, 외롭고, 남편의 자아에 질식한다. 하지만 그 감정은 언제나 억제되고, 말끝에서 묻힌다.
릴리는 그런 램지 부인을 바라보며 고민한다. 사랑은 아름다우나, 왜 여성만이 그것을 입증해야 하는가? 왜 여성만이 누군가의 감정을 흡수하고, 보듬고, 정리해야 하는가? 그녀는 램지 부인의 돌봄에 감탄하면서도, 그 굴레를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울프는 이러한 대비를 통해 돌봄이 여성성의 본질이 아니라 사회가 규정한 역할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릴리의 선택을 통해 그 역할로부터 벗어나는 여성성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4. 울프가 남긴 문장들, 오늘을 비추는 등대처럼
『등대로』는 줄거리가 거의 없다.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인물들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리고, 바다를 바라보고, 식탁에 앉아 대화하거나 침묵한다. 그러나 바로 그 틈에서 여성의 존재는 가장 또렷하게 드러난다.
램지 부인의 죽음은 소설 속에서 단 한 문장으로 처리된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 이후 릴리는 다시 그림 앞에 선다. 그녀는 삶의 한 국면이 끝났음을 느끼며, 자신만의 시선을 정리하고, 그림에 ‘한 줄’을 긋는다.
그 한 줄은 문학적 상징이다. 여성은 돌봄의 역할을 떠나 예술가가 되며, 침묵의 시대를 지나 말하는 존재가 된다. 울프는 이 순간을 통해 독자에게 묻는다. “이제 당신은 어떤 줄을 그을 것인가?”
『등대로』는 단지 한 여름 별장의 이야기나, 가족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침묵과 돌봄을 강요받았고, 동시에 그 굴레를 어떻게 넘어서려 했는 가에 대한 문학적 사유다.








